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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8, 2021, 6:06 AM
[계율(戒律)은 열반의 주춧돌]
4. ‘좋은 습관’ ‘나쁜 습관’
“비구들이여,
3가지 법을 가진 어리석고 우둔한
참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키느니라.
그는 지탄받아 마땅하고 현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많은 악덕을 쌓느니라.
그렇다면 어떤 것이 셋인가?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
말로 짓는 나쁜 행위,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니라.
비구들이여, 이 3가지 법을 가진
어리석고 우둔하고 참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키느니라.
그는 지탄받아 마땅하고 현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많은 악덕을 쌓느니라.
AN3:9 <나쁜 행위 경>,
(Duccarita-sutta)
‘백모삼년’(白毛三年)이란 고사를 알고 계십니까? 순백색의 강아지 터럭을 검게 물들이려고 굴뚝 끝에 3년 동안 매달아 놓았음에도 순백색의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는 이야기.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그래서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의 습성과 기질은 실로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DNA를 통해 유전될 만큼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그러나 고따마 붓다께서는 적극적인 지계의 실천과 인과의 법칙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의해 그와 같은 습성과 기질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위숫디막가』<Sīla-niddesa>에서는 인간의 부정적인 습성과 기질은 지계의 실천을 통해서만이 극복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수행자들이 담마(법) 안에서
가장 먼저 의지해야 할 것은 지계이니라.
계를 잘 지키는 것은 담마를 따라 가는 것.
지계의 이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
중생들의 번뇌의 때는 그 어떤 물로도
씻어낼 수 없으니, 갠지스의 큰 강물,
야무나 강물, 사라부 강물, 아시라와디 강물
마히 큰 강물로도 결코 씻어낼 수 없나니
오직 청정한 계행만이 그 번뇌의 때를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느니라.”
<계(戒)>는 빨리어로 'Sīla(실-라)'라고 합니다.
'Sīla(실-라)'는 [본성·습관·도덕·도덕적 의무·
도덕적 실천]의 뜻을 지닌 명사로서,
'Sīlācarā=도덕적 수행'
'Sīlācaraņa=도덕적 생활'
'Sīlânusati=도덕적 의무(戒)에 대한 주의 깊음'
'Sīlāuposatha=도덕적 의무에 관한 포살'
'Sīlāpāramitā=도덕적 의무의 완성, 지계바라밀'
'Sīlāgandha=훌륭한 행위의 향기, 계향(戒香)'
'Sīlābyasana=도덕적 의무의 상실'
'Sīlāveda=도덕성의 단절, 도덕성의 파괴'
등의 복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도덕 윤리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행위규범입니다. <계(戒)>는 그 도덕 윤리에 기반한 인간의 긍정적인 본성과 바른 습관입니다. <계(戒)>는 개개인의 행복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기준입니다. 불교의 계율은 5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5계는 인간의 부정적인 본성인 감각적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삿된 견해)을 제거하고, 자애와 연민과 지혜라고 하는 긍정적 본성을 계발하기 위한 행위규범입니다. 5계의 계목 하나하나가 바로 ‘나쁜 습관’을 ‘바른’습관‘으로 길들이는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탐욕과 분노는 가장 비번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부정적 본성입니다. 빨리어경 <숫따니빠따> ‘분노’편을 보면,
“마음으로부터 화를 내며
비방을 일삼는 자가 있느니라.
또한 마음이 진실한 사람일지라도
때에 따라 남을 비방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성자는 비방하는 말을 들을지라도
그런 비방에 흔들리지 않느니라.
성자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느니라.
욕심에 이끌리고 욕망에 붙잡힌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또한 아는 대로 떠들어 대느니라.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남에게
자기의 계율과 도덕을 자랑하는 사람,
스스로 자기 일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거룩한 진리를 지니지 못한 사람이라고
이미 진리에 도달한 사람은 말하느니라.
마음이 평온하고 안정된 수행자가 계율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하고 있노라 하면서 뽐내지 않고
이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번뇌에 불타지 않는다면
그는 거룩한 진리를 지닌 사람이라고
이미 진리에 도달한 사람은 말하느니라.
사악함을 물리친 사람은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편견을 보이지 않느니라.
사악함을 물리친 사람은 교만과 거짓을 버렸거늘
어찌 생사윤회에 떨어질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이미 의지할 것도 없고
가까이 해야 할 그 무엇도 없느니라.”
사람들은 저마다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분노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딜 가나 화를 잘 냅니다. 조건이 조금만 안 맞으면 쉽게 화를 냅니다. 버럭 화를 냅니다. 누군가 운전 중에 급차선 변경을 하면서 앞질러 가려고 하면 즉시 차창을 열고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주문한 음식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짜증을 냅니다. 음식이 짜면 짜다고 불만을 하고 싱거우면 싱겁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분쟁을 합니다. 가는 곳마다 갈등 관계를 만들어놓고 스스로 뛰쳐나오거나 쫒겨나곤 합니다. 그는 이렇게 평생 동안 가는 곳마다 부딪히고 안 밖으로 화를 내면서 살아갑니다. 죽을 때도 화의 마음을 가지고 임종을 맞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딜 가나 유쾌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항시 평온한 얼굴과 부드러운 언어로써 상대방을 위로하고 감싸주고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누군가 운전 중에 급차선 변경을 하면서 앞질러 가려고 하면 속도를 늦추면서 안전하게 기어들도록 양보해 줍니다. 주문한 음식이 아무리 늦게 나와도 불평하는 일 없고, 음식이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불만 없이 먹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화합을 시킵니다. 갈등 관계를 해소시켜서 원만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어딜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평생 동안 자애를 실천하며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죽을 때도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임종을 맞습니다.
빨리어경 <숫따니빠따> ‘파멸의 문’편을 보면 파멸에 이르게 하는 ‘나쁜 습관’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설해져 있습니다. 어느 날 고따마 붓다께서 사왓띠성의 제다와나 수도원에 머무실 적에 한 천인이 한밤중에 제따숲을 환하게 비추면서 다가와 예의를 갖춰 절한 뒤 한 곁에 서서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파멸하는 사람에 대해서 부처님께 여쭈옵니다.
파멸에 이르는 문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위대하신 스승께 그것을 여쭙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나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들을 멀리하면서
나쁜 사람이 하는 일을 좋아하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잠을 많이 자는 버릇이 있고,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습관이 있고,
분발하여 정진하지 않고 게으르며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자기는 풍족하게 살고 있으면서
늙고 병든 부모는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바라문이나 사문 또는 다른
걸식하는 이를 거짓말로 속인다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많은 재물과 먹을 것이 풍족한 사람이
그것을 혼자서만 독차지한다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혈통을 뽐내고 재산과 가문을 자랑하면서
자기네 친인척을 멀리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주색잡기에 빠져서
버는 족족 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자신의 아내를 아끼지 않고 삿되게 놀아나며
남의 아내와 어울림을 일삼는다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한창 때가 지난 남자가 젊은 여인을 유혹하고
그녀에 대해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
이와 같은 갖가지 파멸의 문을
현자와 성자들은 잘 살펴서 마침내
진리 따라 행복한 세계에 이르느니라.”
<지계>는 습관입니다. <지계>야말로 최상의 좋은 습관입니다. <지계>의 실천이 습관화 되었을 때 <계율>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가 됩니다. <계행>이 대자유를 향한 수행자의 자연스러운 행보임에도 불구하고, <계율>을 구속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율>은 수행자의 몸과 마음을 옥죄어 행동을 제약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시킨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 때문에 평소 ‘나쁜 습관’이 몸에 베인 사람이 청정한 <계행>을 유지하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그에게 있어 <지계> 실천은 엄청난 정신적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평소 ‘좋은 습관’이 몸에 베인 사람에게는 청정한 <계행>이 마치 꼭 맞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것과 같아서 매우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으면 불편한 착용감 때문에 온종일 발에 신경이 쓰이지만,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으면 이내 신고 있다는 생각을 잊게 됩니다.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 출가자를 보고 마음이 맑아지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천상으로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반기고 절하고 자리를 권하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높은 가정에 태어남으로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인색함의 때를 씻어버리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큰 영향력을 가지도록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형편껏 서로 나누어 가지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큰 재물을 가지도록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질문을 하고 답을 하고 법문을 듣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큰 통찰지로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5가지 경우로 많은 공덕을 쌓느니라.”
AN5:199 <가문 경>(Kula-sutta)
행위가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결국 인생을 바꿉니다. 습관이 성품을 만들고, 성품이 그 사람의 습관을 길들입니다. 대부분의 행·불행은 그 사람이 좋은 습관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나쁜 습관으로 길들여져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는 논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지만, 잘 길들여진 소는 고삐를 풀어놓더라도 달아나는 일 없이 유유히 풀만 뜯을 뿐 망동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길들이기 나름입니다. 청정한 <계행>은 ‘나쁜 습관’에 젖어 있는 사람을 ‘바른 습관’으로 길들여 줍니다. 만일 그가 오욕락의 늪에 빠져있다면 <계행>의 청정함이 그를 오욕락의 늪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한때 고따마 부처님께서 사와띠성의 제따와나 수도원에 머무실 적에 아나타삔디까 장자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주셨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증오 경>(AN5:174)
“생명을 빼앗고 거짓말을 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여러 가지 중독성 물질을 탐닉하는 사람은
5가지 증오를 버리지 않았기에
계행이 나쁜 자라 불리나니
통찰지가 없는 그는 죽어서 악도에 떨어지리.
생명을 빼앗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 갖지 않고 삿된 음행하지 않고
여러 가지 중독성 물질을 탐닉하지 않는 사람은
5가지 증오를 이미 버렸기에
계행이 청정한 자라 불리나니
통찰지를 가진 그는 죽어서 선처에 태어나리.”
불멸 2565(2021). 4.18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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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8, 2021, 6:0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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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戒律)은 열반의 주춧돌]
4. ‘좋은 습관’ ‘나쁜 습관’
“비구들이여,
3가지 법을 가진 어리석고 우둔한
참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키느니라.
그는 지탄받아 마땅하고 현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많은 악덕을 쌓느니라.
그렇다면 어떤 것이 셋인가?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
말로 짓는 나쁜 행위,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니라.
비구들이여, 이 3가지 법을 가진
어리석고 우둔하고 참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파서 엎어버리고 파멸시키느니라.
그는 지탄받아 마땅하고 현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많은 악덕을 쌓느니라.
AN3:9 <나쁜 행위 경>,
(Duccarita-sutta)
‘백모삼년’(白毛三年)이란 고사를 알고 계십니까? 순백색의 강아지 터럭을 검게 물들이려고 굴뚝 끝에 3년 동안 매달아 놓았음에도 순백색의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는 이야기.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그래서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의 습성과 기질은 실로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DNA를 통해 유전될 만큼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그러나 고따마 붓다께서는 적극적인 지계의 실천과 인과의 법칙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의해 그와 같은 습성과 기질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위숫디막가』<Sīla-niddesa>에서는 인간의 부정적인 습성과 기질은 지계의 실천을 통해서만이 극복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수행자들이 담마(법) 안에서
가장 먼저 의지해야 할 것은 지계이니라.
계를 잘 지키는 것은 담마를 따라 가는 것.
지계의 이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
중생들의 번뇌의 때는 그 어떤 물로도
씻어낼 수 없으니, 갠지스의 큰 강물,
야무나 강물, 사라부 강물, 아시라와디 강물
마히 큰 강물로도 결코 씻어낼 수 없나니
오직 청정한 계행만이 그 번뇌의 때를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느니라.”
<계(戒)>는 빨리어로 'Sīla(실-라)'라고 합니다.
'Sīla(실-라)'는 [본성·습관·도덕·도덕적 의무·
도덕적 실천]의 뜻을 지닌 명사로서,
'Sīlācarā=도덕적 수행'
'Sīlācaraņa=도덕적 생활'
'Sīlânusati=도덕적 의무(戒)에 대한 주의 깊음'
'Sīlāuposatha=도덕적 의무에 관한 포살'
'Sīlāpāramitā=도덕적 의무의 완성, 지계바라밀'
'Sīlāgandha=훌륭한 행위의 향기, 계향(戒香)'
'Sīlābyasana=도덕적 의무의 상실'
'Sīlāveda=도덕성의 단절, 도덕성의 파괴'
등의 복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도덕 윤리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행위규범입니다. <계(戒)>는 그 도덕 윤리에 기반한 인간의 긍정적인 본성과 바른 습관입니다. <계(戒)>는 개개인의 행복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기준입니다. 불교의 계율은 5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5계는 인간의 부정적인 본성인 감각적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삿된 견해)을 제거하고, 자애와 연민과 지혜라고 하는 긍정적 본성을 계발하기 위한 행위규범입니다. 5계의 계목 하나하나가 바로 ‘나쁜 습관’을 ‘바른’습관‘으로 길들이는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탐욕과 분노는 가장 비번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부정적 본성입니다. 빨리어경 <숫따니빠따> ‘분노’편을 보면,
“마음으로부터 화를 내며
비방을 일삼는 자가 있느니라.
또한 마음이 진실한 사람일지라도
때에 따라 남을 비방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성자는 비방하는 말을 들을지라도
그런 비방에 흔들리지 않느니라.
성자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느니라.
욕심에 이끌리고 욕망에 붙잡힌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또한 아는 대로 떠들어 대느니라.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남에게
자기의 계율과 도덕을 자랑하는 사람,
스스로 자기 일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거룩한 진리를 지니지 못한 사람이라고
이미 진리에 도달한 사람은 말하느니라.
마음이 평온하고 안정된 수행자가 계율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하고 있노라 하면서 뽐내지 않고
이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번뇌에 불타지 않는다면
그는 거룩한 진리를 지닌 사람이라고
이미 진리에 도달한 사람은 말하느니라.
사악함을 물리친 사람은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편견을 보이지 않느니라.
사악함을 물리친 사람은 교만과 거짓을 버렸거늘
어찌 생사윤회에 떨어질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이미 의지할 것도 없고
가까이 해야 할 그 무엇도 없느니라.”
사람들은 저마다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분노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딜 가나 화를 잘 냅니다. 조건이 조금만 안 맞으면 쉽게 화를 냅니다. 버럭 화를 냅니다. 누군가 운전 중에 급차선 변경을 하면서 앞질러 가려고 하면 즉시 차창을 열고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주문한 음식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짜증을 냅니다. 음식이 짜면 짜다고 불만을 하고 싱거우면 싱겁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분쟁을 합니다. 가는 곳마다 갈등 관계를 만들어놓고 스스로 뛰쳐나오거나 쫒겨나곤 합니다. 그는 이렇게 평생 동안 가는 곳마다 부딪히고 안 밖으로 화를 내면서 살아갑니다. 죽을 때도 화의 마음을 가지고 임종을 맞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딜 가나 유쾌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항시 평온한 얼굴과 부드러운 언어로써 상대방을 위로하고 감싸주고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누군가 운전 중에 급차선 변경을 하면서 앞질러 가려고 하면 속도를 늦추면서 안전하게 기어들도록 양보해 줍니다. 주문한 음식이 아무리 늦게 나와도 불평하는 일 없고, 음식이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불만 없이 먹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화합을 시킵니다. 갈등 관계를 해소시켜서 원만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어딜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평생 동안 자애를 실천하며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죽을 때도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임종을 맞습니다.
빨리어경 <숫따니빠따> ‘파멸의 문’편을 보면 파멸에 이르게 하는 ‘나쁜 습관’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설해져 있습니다. 어느 날 고따마 붓다께서 사왓띠성의 제다와나 수도원에 머무실 적에 한 천인이 한밤중에 제따숲을 환하게 비추면서 다가와 예의를 갖춰 절한 뒤 한 곁에 서서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파멸하는 사람에 대해서 부처님께 여쭈옵니다.
파멸에 이르는 문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위대하신 스승께 그것을 여쭙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나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들을 멀리하면서
나쁜 사람이 하는 일을 좋아하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잠을 많이 자는 버릇이 있고,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습관이 있고,
분발하여 정진하지 않고 게으르며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자기는 풍족하게 살고 있으면서
늙고 병든 부모는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바라문이나 사문 또는 다른
걸식하는 이를 거짓말로 속인다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많은 재물과 먹을 것이 풍족한 사람이
그것을 혼자서만 독차지한다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혈통을 뽐내고 재산과 가문을 자랑하면서
자기네 친인척을 멀리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주색잡기에 빠져서
버는 족족 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자신의 아내를 아끼지 않고 삿되게 놀아나며
남의 아내와 어울림을 일삼는다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한창 때가 지난 남자가 젊은 여인을 유혹하고
그녀에 대해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
이것이 파멸의 문이니라.
.......
이와 같은 갖가지 파멸의 문을
현자와 성자들은 잘 살펴서 마침내
진리 따라 행복한 세계에 이르느니라.”
<지계>는 습관입니다. <지계>야말로 최상의 좋은 습관입니다. <지계>의 실천이 습관화 되었을 때 <계율>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가 됩니다. <계행>이 대자유를 향한 수행자의 자연스러운 행보임에도 불구하고, <계율>을 구속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율>은 수행자의 몸과 마음을 옥죄어 행동을 제약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시킨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 때문에 평소 ‘나쁜 습관’이 몸에 베인 사람이 청정한 <계행>을 유지하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그에게 있어 <지계> 실천은 엄청난 정신적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평소 ‘좋은 습관’이 몸에 베인 사람에게는 청정한 <계행>이 마치 꼭 맞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것과 같아서 매우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으면 불편한 착용감 때문에 온종일 발에 신경이 쓰이지만,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으면 이내 신고 있다는 생각을 잊게 됩니다.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 출가자를 보고 마음이 맑아지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천상으로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반기고 절하고 자리를 권하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높은 가정에 태어남으로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인색함의 때를 씻어버리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큰 영향력을 가지도록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형편껏 서로 나누어 가지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큰 재물을 가지도록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질문을 하고 답을 하고 법문을 듣느니라.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을
큰 통찰지로 인도하나니
그때 그 가정은 도닦음을 실천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계를 잘 지키는 출가자들이
가정을 방문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5가지 경우로 많은 공덕을 쌓느니라.”
AN5:199 <가문 경>(Kula-sutta)
행위가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결국 인생을 바꿉니다. 습관이 성품을 만들고, 성품이 그 사람의 습관을 길들입니다. 대부분의 행·불행은 그 사람이 좋은 습관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나쁜 습관으로 길들여져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는 논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지만, 잘 길들여진 소는 고삐를 풀어놓더라도 달아나는 일 없이 유유히 풀만 뜯을 뿐 망동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길들이기 나름입니다. 청정한 <계행>은 ‘나쁜 습관’에 젖어 있는 사람을 ‘바른 습관’으로 길들여 줍니다. 만일 그가 오욕락의 늪에 빠져있다면 <계행>의 청정함이 그를 오욕락의 늪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한때 고따마 부처님께서 사와띠성의 제따와나 수도원에 머무실 적에 아나타삔디까 장자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주셨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증오 경>(AN5:174)
“생명을 빼앗고 거짓말을 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여러 가지 중독성 물질을 탐닉하는 사람은
5가지 증오를 버리지 않았기에
계행이 나쁜 자라 불리나니
통찰지가 없는 그는 죽어서 악도에 떨어지리.
생명을 빼앗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 갖지 않고 삿된 음행하지 않고
여러 가지 중독성 물질을 탐닉하지 않는 사람은
5가지 증오를 이미 버렸기에
계행이 청정한 자라 불리나니
통찰지를 가진 그는 죽어서 선처에 태어나리.”
불멸 2565(2021). 4.18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