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애착에 대하여 (2) / 빤냐완따 스님

관리자
2024-08-18
조회수 132



《 '애착'에 대하여 》2/5



                  [ 2 ]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갈애>는 일어나고 거기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인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마음>은...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대상>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ㆍㆍㆍ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소멸되는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인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마음>은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대상>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ㆍㆍㆍ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D22]《Mahāsatipaṭṭhāna Sutta》

                                                                (대념처경) 중에서

                                                             - 초기불전연구원 역 



"아난다여, <취착>하기 마련인 법(감각대상)들에서 

<달콤함>을 보면서 머무는 자에게 <갈애>는 증가한다.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

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아난다여, <취착>하기 마련인 법(감각대상)들에서 

<위험>을 보면서 머무는 자에게 <갈애>는 소멸한다.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죽음과 근심·탄식·

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S12:60]《Nidāna Sutta》

                                                                 (인연 경) 중에서     

                                                            - 초기불전연구원 역 



제행무상(諸行無常)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즉, <발생>이 있으면 반드시 <소멸>도 있는 법. 지혜로운 사람은 현상의 <발생> 속에서 항상 현상의 <소멸>을 보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그 무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항상하지 않다는 것. <시각>도 항상하지 않고, <형색>도 항상하지 않고, <감각접촉>도 항상하지 않고, <감각접촉 느낌>도 항상하지 않고, <감각접촉 인식>도 항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이처럼 무상한 것을 항상한 것으로 보고, 괴로움인 것을 즐거움으로 인식하면서, 나의 자아가 아닌 것을 항상한 나로 잘못 보기 때문에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에 달라붙어 <갈애>하고 <취착>합니다. 


모든 현상은 조건을 따라 생겨났다 조건을 따라 사라집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여섯 감각의 접촉느낌 속에서 생기고 사라짐을 분명하게 본다면 그 느낌에 대해서 <갈애>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하고 무너지고 소멸하는 것들 속에서 <위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염오하는 지혜>가 생겨난 것입니다. 접촉느낌은 단지 접촉느낌일 뿐, 그것은 항상할 수 없고 영원할 수 없습니다. 접촉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대상을 왜곡해서 보게 됩니다. 선입견ㆍ고정관념ㆍ인습적 개념의 색안경으로 대상을 보게 됩니다. 색인경을 쓰고 보면 썩은 칡넝쿨이 뱀으로 보이고, 안개를 연기로 오인하게 됩니다.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생겨납니다. <느낌>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즉,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중립적인 느낌>입니다. <6내처>(內處 :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ㆍ촉각ㆍ마음거울)가 <6외처>(外處 : 형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마음대상)와 만나는 순간 <6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 意識 )과 함께 3가지 <느낌> 가운데 1가지의 <느낌>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갈애>와 <취착>은 <즐거운 느낌>에만 달라붙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의 대상이 바로 <즐거운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쾌한 느낌> 역시 <갈애>와 <취착>의 대상이 됩니다. <불쾌한 느낌>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면서, <불쾌한 느낌>이 있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애>를 일으킵니다. 특히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이 극심한 경우에는 '고통스러운 목숨 더 연명해서 뭐해' 혹은 '다음생이 어딨어 죽으면 그만이지' 하고 인과(因果)를 부정하면서 <비존재(허무)에 대한 갈애>를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갈애>는 <중립적인 느낌> 혹은 <평정심>에도 달라붙습니다. <갈애>가 달라붙어 있는 <평정심>을 <어리석은 평정심>, 즉 <모하 우빽카>(Moha-upekkha)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매순간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을 경험합니다. 대개는 <느낌>의 성품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그 <느낌>에 달라붙어 <갈애>하고 <취착>합니다. 그러나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순간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면 <즐거운 느낌>은 단지 하나의 느낌일 뿐 더이상 <갈애>와 <취착>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불쾌한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면 <불쾌한 느낌>은 단지 하나의 느낌일 뿐 더이상 <갈애>와 <취착>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중립적인 느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느낌>의 무상한 성품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면 깊게 뿌리내린 <갈애>의 잠재성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갈애>는 <갈애>를 낳습니다. <갈애>가 깊어지면 <집착>을 낳고, <집착>이 고착화된 것을 <취착>(取着)이라고 합니다. <갈애>와 <취착>은 건강하지 못한 심리상태입니다. <갈애>와 <취착>이 있는 상태에서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들뜬 상태여서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방황하게 됩니다. 지나간 과거나 오지않은 미래에 매달리게 됩니다. 매달리다 보면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음공간이 좁아져서 자아(에고)라고 하는 견고한 틀에 갖히게 됩니다 


자아의 틀에 갖히면 감각접촉이 발생하는 순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 대상에 달라붙어 <갈애>하고 <취착>하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면 사람에 대해 <집착>하게 되고, 소리를 들을 때는 소리에 <집착>하게 되고, 음식을 먹을 때는 음식맛에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하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왜곡해서 보게 됩니다. 그로인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집착>하는 매순간 <고통>이 발생합니다. <갈애> <집착> <취착>이 쉬어질 때 비로소 궁극의 해탈ㆍ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생사윤회의 고단한 여정 마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만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면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충족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평생 혹은 세세생생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한 순간의 달콤함을 영원한 달콤함으로 착각하여 <갈애>하고 <취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밑바닥에는 <괴로움>이라는 <독사 한 마리>가 똬리틀고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왜 괴로움일까요? 그것은 그 욕망이 1회성, 단발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습니다. 밑 빠진 물항아리와도 같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마실 물이 없을 때 바닷물을 떠서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한 순간의 시원한 쾌감 뒤에는 반드시 소금물의 고통이 뒤따릅니다. 바닷물이 바닷물인 줄 몰라서도 마시지만 바닷물인 줄 알고서도 마십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와 <취착>의 근본원인은 <무명>(無明, Avijjha, 진리에 대한 무지)입니다. <무명> 때문에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 대해서 <갈애>하고 <취착>하게 됩니다. 또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와 <취착>의 기저에는 잘못된 견해가 내재해 있습니다. 이로인해 세상사람들은 소리를 들을 때, 탐ㆍ진ㆍ치에 기반한 감각적 욕망으로 소리를 듣습니다. 대상을 바라볼 때도, 냄새를 맡을 때도, 음식을 맛볼 때도, 물건을 만질 때도 감각적 욕망으로 만집니다. 감각적 욕망이 시키는대로 듣고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며 즐깁니다. 


형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마음대상의 무상한 성품을 알지 못한 채 갈구하며 집착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항상하지 않고 변하고 무너지고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항상하지 않고 변하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들은 묶어둘 수 없는 성질의 것들입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계속해서 붙잡으려 하기 때문에 괴로움(불만족)이 생겨납니다. 묶어둘 수 없는 것을 묶어둘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삿된 견해입니다. 


<6내처>(內處 :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ㆍ촉각ㆍ마음거울)가 <6외처>(外處 : 형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마음대상)와 접촉하는 순간 <6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 意識)과 함께 <감각접촉 느낌>이 생겨납니다. <감각접촉 느낌>이 생겨나는 순간, <감각접촉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하지 못하면 <접촉느낌>에 대한 <갈애>와 <취착>이 생겨납니다. <갈애>와 <취착>이 결국 <생노병사우비고뇌>(生老病死憂悲苦惱) 라고 하는 괴로움을 발생시킵니다. 


즉, 괴로움으로 이끄는 <갈애>와 <취착>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6내처>와 <6외처>가 접촉하는 순간 그 접촉감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해야 합니다. 일어나면 일어나는 줄 알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줄 알아야 합니다. 분명한 앎과 함께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접촉감각을 매순간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림한다면 거기에는 접촉순간의 무상한 감각만 있을 뿐 대상에 달라붙어 <애착>하는 마음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미 달라붙어 있는 <애착>이 있다면 그 <애착>은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아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시각>에서도 싫어서 떠나고 <청각>에서도 싫어서 떠나고 

<후각>에서도 싫어서 떠나고 <미각>에서도 싫어서 떠나고 

<촉각>에서도 싫어서 떠나며 <정신>에서도 싫어서 떠나고,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그가 해탈할 때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앎이 생겨나,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분명히 안다.” 


                             [S35:1]《Paṭhamājjhattāniccasutta》

                                                  (내적인 무상의 경) 중에서

                                                 -한국 빠알리어 성전협회 역 


            ※

                                             

불멸 2568. 4. 6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



[출처] 애착에 대하여 (뺜냐완따 스님) (한국 테라와다 불자들의 모임) | 작성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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