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세나디 꼬살라는 브라흐마닷따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는데 후에 스님이 되어 아라한까지 도달했습니다.
티벳의 서적에는 제따라는 다른 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귀사(뻬따왓투) 주석서는 빠세나디의 다른 두 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름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딸들 가운데 와지리와 수마나 공주는 빨리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마나 공주는 비구니 교단에 들어갔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상응부 경전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나타삔디까가 한번은 제따와나 수도원의 개원식에서 부처님의 영접을 맡기기 위하여 빠세나디 왕에게 일곱 살 먹은 딸 수마나 공주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존경하는 손님을 맞이할 때의 전통에 따라, 빠세나디 왕은 화환과 성수로 가득 찬 물병을 든 500명의 소녀들과 함께 수마나 공주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그때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난 후 수다원과를 얻었습니다. 웁비리 왕비에게서 난 빠세나디 왕의 또 다른 공주 지완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습니다.
욱고 시리왓다와 산따띠는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최고 대신들이었습니다. 그는 딱까실라에서 같이 공부한 동급생이었던 말라의 왕자 반둘라를 그의 충성에 보답하기 위하여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다른 고위직 관리들은 반둘라를 매우 시기하여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가 32명의 아들과 함께 궁으로 올 때 수천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으며 사령관에게 애정과 호의를 표현했습니다.
질투에 찬 관리들은 왕이 반둘라를 의심하여 죽이도록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빠세나디 왕은 관리들에게 속아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가장 사랑하고 의무를 다하며 충성스러운 사령관인 반둘라와 그의 32명의 아들들을 빳짠따 지역으로 가게 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임무를 완수한 후 돌아오는 길에 그들 모두는 처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왕은 나중에 그들이 무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다시는 정신적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 후에 왕은 반둘라의 조카인 디가 까라야나를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왕에게는 깔라와 준하라고 하는 다른 두 대신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왕이 비교할 수 없는 보시(아사디사 다나)를 부처님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대신 깔라는 그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부처님의 설법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나라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다른 대신 준하는 법문에 감사했으며 왕은 그 일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 왕은 왕국을 7일간 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7일 동안 그에게 탁발 보시 행사를 하도록 시켰습니다. 이것은 아나타삔디까 같은 귀족들에게 우호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아나타삔디까가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부처님과 500명의 스님들께 보시를 했습니다. 아끼던 것이 부서져서 슬픔에 잠겨 있던 할머니를 위로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한 달 동안 보시를 했습니다.
왕의 조카 수닷사나와 산자야 바라문은 그의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날리장가 바라문은 말리까 왕비의 친한 친구였습니다. 담마쩨띠야 경에서는 리시닷따 타빠띠와 뿌라나 타빠띠는 왕의 가장 충성스러운 하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수장은 빤짜깡가 타빠띠였습니다.
밧데라까, 에까뿐다리까 그리고 세따는 왕이 가장 좋아하는 코끼리들이었습니다. 그는 길들여진 호랑이 새끼와 왕실의 족보있는 전령인 새를 갖고 있었습니다.
삿따자띨라 경은 왕이 고행자로 위장한 사람들을 임명한 것을 간첩행위로 간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빨리 경전에 의하면 짱끼 바라문, 따룩카 바라문, 뽁카라사띠 바라문, 자눗소니 바라문 그리고 또데이야 바라문은 모두 왕실 제사장이었습니다. 로힛짜 경은 왕이 마을, 토지 그리고 재산을 선물로 로힛짜 바라문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들 바라문들은 부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기 때문에 왕과 그 가족에게 깊이 감사했습니다.
빠야시라잔냐 경은 왕이 빠야시라잔냐 왕에게 토지를 선물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아들로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나비씻따라자’ 즉 즉위하지 못한 왕으로 불렸습니다.
빠세나디 왕이 한번은 빔비사라 왕에게 부유한 가문 하나를 꼬살라로 보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난자니야 사왓티를 사께따 성에 영구히 정착하도록 보냈습니다.
뇌물과 기만
한번은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관리들이 자신의 면전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고위 관리들에게는 도덕심이 부족했는데 특히 사법 관리들이 그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뇌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아닌 사람을 주인이라고 선고했고, 그 반대이기도 했는데 특히 토지의 소유권 문제에 대하여 그러했습니다. 왕은 매우 근심하여 부처님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습니다. 부처님은 법률 송사를 다루는 앗타까라나 경을 설법하여 들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 자신조차도 뇌물을 받았는데, 한 번은 10만 금화(까하빠나)를 뇌물로 받은 적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자따까 주석서에 따르면 다른 띳티야(외도) 수행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주목을 받고 싶어서 제따와나 수도원의 바로 뒤에 수도원을 짓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우선 그들은 왕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왕에게 10만 금화를 제공했습니다. 외도들은 세속의 사람으로서 물욕의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어떤 유형의 인간이든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루 자따까(본생담)의 이야기는 이 사건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제따와나 수도원 뒤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을 듣고 부처님은 아난다 테라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시고 테라에게 다른 스님들을 동행시켜 왕을 만나러 보냈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는 궁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이 그가 출타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다시 부처님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마하 테라를 왕을 만나도록 보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왕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손수 500명의 스님들을 거느리고 왕궁으로 가서 왕을 만났습니다.
왕이 올린 공양을 드신 후 부처님께서는 바루 자따까(본생담)를 설법하셨습니다. 왕은 뇌물을 받은 고대의 왕들이 고행자들 사이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은 띳티야 옆에 짓고 있던 사원 건축을 중지시키고 허물어버렸습니다. 후에 그는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라자까라마 사원을 같은 자리에 건축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왕들과 고위층들이 엄격한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설법을 종종 하시었습니다.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되며 다스림과 정의 실현에 있어 공평해야 하며 그래서 청정한 종교적 생활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셨습니다.
“가-완쩨- 따라마-나-낭, 짐항 갓찬띠 뿐가오-.
삽바- 가-위- 짐항 얀띠, 넨떼- 짐항 가떼- 사띠.
에-와메-와 마눗세-수, 요- 호-띠 셋타삼마또-,
소- 쩨- 아담망 짜라띠, 빠게-와 이따라- 빠자-.
삽방 랏탕 둑캉 세-띠, 라-자- 쩨- 호-띠 아담미꼬-.
강에서 헤엄쳐 나아가는 무리에서 우두머리 황소가 길을 잘못 들면 뒤따르는 무리들 또한 길을 잘못 들게 된다.
마찬가지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비도덕적인 짓을 한다면 보통사람들이야 말해 무얼 하겠는가.
그러므로 만일에 왕이 비종교적이면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
“가-완쩨- 따라마-나-낭, 우중 갓찬띠 뿐가오-.
삽바- 가-위- 우중 얀띠, 넨떼- 우중 가떼- 사띠.
에-와메-와 마눗세-수, 요- 호-띠 셋타삼마또-,
소- 쩨-삐 담망 짜라띠, 빠게-와 이따라- 빠자-.
삽방 랏탕 숙캉 세-띠, 라-자- 쩨- 호-띠 담미꼬-.
강에서 헤엄쳐 나아가는 무리에서 우두머리 황소가 길을 바로 들면 따르는 무리들 또한 바른 길로 들게 된다.
그러므로 고위직에 있는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면 다름 사람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왕이 경건하고 종교적이면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만일 왕이 경계를 늦추지 않는 삶을 산다면 관리들도 그러할 것이라고 왕에게 충고했습니다. 이것은 상응부 경전 깔르야나밋따 경(선우경)에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는 브라흐마닷따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는데 후에 스님이 되어 아라한까지 도달했습니다.
티벳의 서적에는 제따라는 다른 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귀사(뻬따왓투) 주석서는 빠세나디의 다른 두 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름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딸들 가운데 와지리와 수마나 공주는 빨리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마나 공주는 비구니 교단에 들어갔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상응부 경전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나타삔디까가 한번은 제따와나 수도원의 개원식에서 부처님의 영접을 맡기기 위하여 빠세나디 왕에게 일곱 살 먹은 딸 수마나 공주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존경하는 손님을 맞이할 때의 전통에 따라, 빠세나디 왕은 화환과 성수로 가득 찬 물병을 든 500명의 소녀들과 함께 수마나 공주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그때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난 후 수다원과를 얻었습니다. 웁비리 왕비에게서 난 빠세나디 왕의 또 다른 공주 지완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습니다.
욱고 시리왓다와 산따띠는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최고 대신들이었습니다. 그는 딱까실라에서 같이 공부한 동급생이었던 말라의 왕자 반둘라를 그의 충성에 보답하기 위하여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다른 고위직 관리들은 반둘라를 매우 시기하여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가 32명의 아들과 함께 궁으로 올 때 수천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으며 사령관에게 애정과 호의를 표현했습니다.
질투에 찬 관리들은 왕이 반둘라를 의심하여 죽이도록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빠세나디 왕은 관리들에게 속아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가장 사랑하고 의무를 다하며 충성스러운 사령관인 반둘라와 그의 32명의 아들들을 빳짠따 지역으로 가게 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임무를 완수한 후 돌아오는 길에 그들 모두는 처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왕은 나중에 그들이 무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다시는 정신적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 후에 왕은 반둘라의 조카인 디가 까라야나를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왕에게는 깔라와 준하라고 하는 다른 두 대신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왕이 비교할 수 없는 보시(아사디사 다나)를 부처님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대신 깔라는 그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부처님의 설법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나라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다른 대신 준하는 법문에 감사했으며 왕은 그 일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 왕은 왕국을 7일간 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7일 동안 그에게 탁발 보시 행사를 하도록 시켰습니다. 이것은 아나타삔디까 같은 귀족들에게 우호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아나타삔디까가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부처님과 500명의 스님들께 보시를 했습니다. 아끼던 것이 부서져서 슬픔에 잠겨 있던 할머니를 위로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한 달 동안 보시를 했습니다.
왕의 조카 수닷사나와 산자야 바라문은 그의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날리장가 바라문은 말리까 왕비의 친한 친구였습니다. 담마쩨띠야 경에서는 리시닷따 타빠띠와 뿌라나 타빠띠는 왕의 가장 충성스러운 하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수장은 빤짜깡가 타빠띠였습니다.
밧데라까, 에까뿐다리까 그리고 세따는 왕이 가장 좋아하는 코끼리들이었습니다. 그는 길들여진 호랑이 새끼와 왕실의 족보있는 전령인 새를 갖고 있었습니다.
삿따자띨라 경은 왕이 고행자로 위장한 사람들을 임명한 것을 간첩행위로 간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빨리 경전에 의하면 짱끼 바라문, 따룩카 바라문, 뽁카라사띠 바라문, 자눗소니 바라문 그리고 또데이야 바라문은 모두 왕실 제사장이었습니다. 로힛짜 경은 왕이 마을, 토지 그리고 재산을 선물로 로힛짜 바라문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들 바라문들은 부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기 때문에 왕과 그 가족에게 깊이 감사했습니다.
빠야시라잔냐 경은 왕이 빠야시라잔냐 왕에게 토지를 선물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아들로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나비씻따라자’ 즉 즉위하지 못한 왕으로 불렸습니다.
빠세나디 왕이 한번은 빔비사라 왕에게 부유한 가문 하나를 꼬살라로 보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난자니야 사왓티를 사께따 성에 영구히 정착하도록 보냈습니다.
뇌물과 기만
한번은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관리들이 자신의 면전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고위 관리들에게는 도덕심이 부족했는데 특히 사법 관리들이 그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뇌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아닌 사람을 주인이라고 선고했고, 그 반대이기도 했는데 특히 토지의 소유권 문제에 대하여 그러했습니다. 왕은 매우 근심하여 부처님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습니다. 부처님은 법률 송사를 다루는 앗타까라나 경을 설법하여 들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 자신조차도 뇌물을 받았는데, 한 번은 10만 금화(까하빠나)를 뇌물로 받은 적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자따까 주석서에 따르면 다른 띳티야(외도) 수행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주목을 받고 싶어서 제따와나 수도원의 바로 뒤에 수도원을 짓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우선 그들은 왕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왕에게 10만 금화를 제공했습니다. 외도들은 세속의 사람으로서 물욕의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어떤 유형의 인간이든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루 자따까(본생담)의 이야기는 이 사건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제따와나 수도원 뒤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을 듣고 부처님은 아난다 테라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시고 테라에게 다른 스님들을 동행시켜 왕을 만나러 보냈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는 궁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이 그가 출타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다시 부처님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마하 테라를 왕을 만나도록 보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왕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손수 500명의 스님들을 거느리고 왕궁으로 가서 왕을 만났습니다.
왕이 올린 공양을 드신 후 부처님께서는 바루 자따까(본생담)를 설법하셨습니다. 왕은 뇌물을 받은 고대의 왕들이 고행자들 사이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은 띳티야 옆에 짓고 있던 사원 건축을 중지시키고 허물어버렸습니다. 후에 그는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라자까라마 사원을 같은 자리에 건축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왕들과 고위층들이 엄격한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설법을 종종 하시었습니다.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되며 다스림과 정의 실현에 있어 공평해야 하며 그래서 청정한 종교적 생활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셨습니다.
“가-완쩨- 따라마-나-낭, 짐항 갓찬띠 뿐가오-.
삽바- 가-위- 짐항 얀띠, 넨떼- 짐항 가떼- 사띠.
에-와메-와 마눗세-수, 요- 호-띠 셋타삼마또-,
소- 쩨- 아담망 짜라띠, 빠게-와 이따라- 빠자-.
삽방 랏탕 둑캉 세-띠, 라-자- 쩨- 호-띠 아담미꼬-.
강에서 헤엄쳐 나아가는 무리에서 우두머리 황소가 길을 잘못 들면 뒤따르는 무리들 또한 길을 잘못 들게 된다.
마찬가지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비도덕적인 짓을 한다면 보통사람들이야 말해 무얼 하겠는가.
그러므로 만일에 왕이 비종교적이면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
“가-완쩨- 따라마-나-낭, 우중 갓찬띠 뿐가오-.
삽바- 가-위- 우중 얀띠, 넨떼- 우중 가떼- 사띠.
에-와메-와 마눗세-수, 요- 호-띠 셋타삼마또-,
소- 쩨-삐 담망 짜라띠, 빠게-와 이따라- 빠자-.
삽방 랏탕 숙캉 세-띠, 라-자- 쩨- 호-띠 담미꼬-.
강에서 헤엄쳐 나아가는 무리에서 우두머리 황소가 길을 바로 들면 따르는 무리들 또한 바른 길로 들게 된다.
그러므로 고위직에 있는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면 다름 사람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왕이 경건하고 종교적이면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만일 왕이 경계를 늦추지 않는 삶을 산다면 관리들도 그러할 것이라고 왕에게 충고했습니다. 이것은 상응부 경전 깔르야나밋따 경(선우경)에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