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법문


앗타상히따(atthasaṁhita)-이익과 도움이 되는 것 (20111122) - 빤냐와로 마하테로

담마마-마까
2021-05-22
조회수 281

https://youtu.be/dXgxXrIA5V4


* 앗타상히따(atthasaṁhita)-이익과 도움이 되는 것 (20111122)  <녹취법문>

 

  "여러분들은 적어도 그런 선택된 자들이 자꾸 되어야 됩니다. 

    법을 설할 수 있게끔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오늘은 앗타상히따(atthasaṁhita)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스님이 그래도 참 법문을 많이 하는 편이죠? 다른 곳에 비하면 법문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 법문을 듣고 여러분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어떤 이익이 되는지 한 번 얘기를 해봐. 듣고 나서 돌아서버리면 다 까먹어버리나? (수행자 대답)

 

이 앗타상히따라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들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야 하고 이익이 있어야 된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스님 법문을 통하든지 아니면 다른 스님 법문을 통하든지 아니면 경전을 읽든지 또 수행을 하든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도움이 되고 이익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앗타상히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앗타는 이익이 있다는 이익이라는 것이고, 상히따는 가져온다, 모아서 가져온다는 그런 뜻입니다.

 

만약에 부처님 같으면 이익이 없고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라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할까? 법문을 할까 말까? 스님도 가끔씩 다른데 법문을 하러 가다보면 참 법문하기 힘드는 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두 시간을 해달고 해서 갔는데 두 시간을 못하고, 한 시간도 채 못하고 그냥 나오는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고 그리합니다.

 

그걸 인제 부처님이 논에다가 비유를 해 놓은 게 있습니다. 논이 아주 기름질 것 같으면 거기다가 곡식을 재배를 하면 금방 잘 자라서 수확을 잘 할 수가 있는데, 기름지지 않으면 척박할 것 같으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그거 수확 잘 못합니다.

 

스님이 아무리 똑같은 법문이라 하더라도 열심히 해도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어떨 때는 가서 내가 지금 이거 공염불하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을 많이 받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용도 물론 알차지 못할 뿐아니라 하고 나서도 다음에 저기서 또 부르면 안 가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 먼저 들어.

근데 적어도 우리 선원 식구들은 인제는 스님 법문이 없어도 충분히 인제 자율적으로 잘 해나가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법문을 하면 하는 만큼 그마만큼 이익이 있고 그마만큼 도움이 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게 인제 앗타상히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것을 듣고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있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이익이 있지 않을거 같으면 그 법문은 공염불이 돼버립니다. 이익이 있도록 만드는 건 여러분들이 만들어야 됩니다. 그걸 가슴에 새겨서 자꾸자꾸 되새기고,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도움을 받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화를 내지마라. 화를 내는 것은 이렇게 나쁘다” 할 것 같으면 화가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을 끄집어내가지고 화를 안 내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재가 제자 중에서 가장 친했던 두 사람이 있는데 욱가 장자와 아나타삔디까 장자입니다. 두 사람이 아주 친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은 나중에 결혼해가지고 아들 딸을 낳으면 그 딸은 상대방 집에 시집보내자 하고 결의를 맺어놨습니다. 그래서 아나타삔디까의 딸을 욱가 장자 집에 시집을 보냅니다.

 

욱가 장자는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그런 분은 아닙니다. 당연히 다른 스승들을 초청해가지고 공양을 올리고 하니까 이 아나타삔디까의 딸인 마하쭐라 수밧다라고 하는 이 딸이 그것을 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교도 스님들을 초청해보니까는 공양도 조심스럽게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법문도 잘 해주지도 않고 이러거든.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실컷 떠들고 욕하고 하니깐 공양청 하는 옆에 가서 시중을 들려고 하질 않는 거라.

 

그래서 욱가 장자가 그렇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누구를 그렇게 따르기에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 왔을 때 그렇게 썩 기뻐하지 않느냐 하니까, 저는 부처님 제자들을 존경합니다. 왜 그렇게 부처님 제자들을 존경하느냐 물어보니까 그런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제자들은 항상 감각기관을 잘 제어를 한다는 거라. 그래서 화를 내는 법도 없고, 그렇게 욕심부리는 법도 없고, 공양을 하더라도 조심해서 조용하게 알아차리면서 먹기 때문에 실수하는 법이 없고, 그릇 하나 땡그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도 없다는 거라. 말을 할 때나, 생각하는 것이나, 아니면 행동하는 것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분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분들을 존경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은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을 한번 공양초청을 해보자 하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날 쭐라수밧다의 아버지되는 아나타삔디까가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내일 제자들하고 같이 와서 우리집에 와서 공양하십시오” 하니까 부처님이 그럽니다. 나는 이미 다른 곳에 선약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나타삔디까가 가만히 보니까 그날 자기가 최고 먼저 왔거든. 누가 먼저 예약을 할리가 없거든.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부처님한테 물어보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의 딸이 나에게 공양청을 했다. 자기 딸이 온 적이 없거든. 멀리 사왓디 성에 시집간 딸이 올 리가 없는데,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서 금정산에 눈이 덮여있으면 금정산이 잘 보입니까? 잘 보이겠죠 다른 때보다도. 근데 여기에 이 선원 방이 불이 꺼져있다 할 거 같으면 옆 사람도 안 보입니다. 옆 사람이 훨씬 금정산보다도 가깝죠?

그래서 내 법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은 훨씬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거라. 멀리 사왓디 성에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라. 오히려 멀리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더 가까이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법을 설한다는 거라.

 

부처님이 차별을 하는 거 같지만 어떻게 보면 효율적입니다. 이 법을 들어서 이익이 있고 도움이 되는 사람들에게 먼저 법을 설하겠다는 거라. 그릇이 완전할 것 같으면 물을 부으면 물이 완전하게 담겨서 오래도록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금이 가 있는 그릇은 물을 부어놓으면 며칠 있으면 다 새어버립니다. 하물며 구멍이 뚫려 있는 그릇이라 할 것 같으면 더더욱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진리를 듣고 한사람 한사람이 번뇌를 자꾸 여의어 가가지고 해탈에 이르도록 만들어주는 게 부처님 설법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그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있고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부합한 사람들에게는 좀 더 자세하게 법을 설해준다는 그런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진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들을 자꾸 길러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능력이 없도록 만들어주는 게 뭐가 있을까? 아, 법문을 듣고 그것을 이해해서 실천할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는데 그렇게 안 되도록 만드는 게 뭐가 있을까? 그게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악의를 품고 있든지, 의심을 가지고 있든지, 욕심을 많이 부리든지 이런 다섯 가지 장애들입니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지로입니다. 게으름부리려 하고, 또 자꾸 생각을 굴리려고 하고, 실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적으로 자꾸 붙잡고 있고, 그런 것들이 다 장애입니다. 그런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면 수행이 안됩니다. 법문을 듣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능력을 자꾸 키워줘야 되는데 법문이 밑빠진 독과 마찬가지로 새어버릴 것 같으면 이익이 없다는 거라.

 

그러면은 이런 법문들이나 수행에서 능력을 키워주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

그걸 보통 스님들은 4·4·4·5·5·7·8 그렇게 얘기합니다. 37조도품!

 

처음 4, 사념처죠.

몸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느낌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려 나가는 것, 그것이 처음 4개입니다.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 내가 걷고 있으면 걷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앉아 있는데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프다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탐욕이 일어나는 건지 아니면 화가 일어나는 건지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다스리고, 그리고 수행하다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나면 그것도 하나의 현상이구나 알아차려서 다스려나가고, 그래서 4가지 신·수·심·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나가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자신의 능력을 키워주는 요인입니다. 이게 처음의 4입니다.

 

그다음 4는 뭘까? 사정근이라고 보통 얘기하죠.

일어나지 않는 악한 것은 일으키지 않을려고 하고, 일어난 악한 것은 제거할려고 노력하고, 일어나지 않는 선한 것은 일으킬려고 노력하고, 일어난 선한 것은 더욱더 증장시킬려고 노력하고,

어떤 것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것에 따라서 더욱더 증장시켜야 되는 것과, 그렇지 않고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고 제거시켜야 되는 것이 뭔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림으로 인해서 스님들이 그 공양을 잡숫고 올바르게 부처님 법을 전해주는 이익이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것은 더욱더 해야 되는 것이고, 내 마음에서 분노가 있으면 그 분노는 나를 해치고 다른 사람들을 해꼬지 한다고 알 거 같으면 그것은 일으키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선과 악에 대해서 분명하게 노력을 해서 끊어내고 증장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이걸 사정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4가지.


그다음에 4신족이라 그럽니다. 선정을 개발하기 위한 4가지 수행방법입니다.

1선정부터 4선정 까지를 자꾸 개발하도록 하는 것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해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려 나가는 것, 그래서 그런 끊임없이 알아차려나가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을 경험하는 것, 그 기쁨들이 몸과 마음에서 잠잠해져 오면서 오는 정신적인 즐거움들을 경험하는 것, 그러한 것들도 모두다 하나의 대상으로 알아차려서 어떤 경우라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 이런 것들이 4선정입니다. 사선정을 자꾸 경험하도록 하십시오.

수행에서만 사선정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것에서도 다 사선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보시하는 것으로 인해서,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서, 또한 수행하는 것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는 것으로 인해서 다 선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들을 갖다가 자꾸 늘려나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인제 처음 4·4·4 입니다.

 

그다음에 5·5.

처음 5는 오근이라고 이렇게 얘기하죠.

믿음과 노력과 알아차림과 마음집중하는 것과 지혜, 이것들을 자꾸 개발하는 것. 어떻게 하면 부처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담마와 상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이 만약에 경전을 외우는 것으로 인한 것이면 경전을 자꾸 외우도록 해야되는 거고, 스님 법문을 통할 거 같으면 스님 법문을 자꾸 들어야 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게을러지지 않고 더욱더 바른 방향으로 노력을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찾아냈을 거 같으면 그 방법으로 계속 나아가는 거고,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어떤 것이고, 그리고 지혜가 어떻게 하면 개발되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들을 자꾸 개발해나가도록 하는 것, 그게 인제 오근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 조금 전에 한 것이 오근입니다.)

 

그다음에 5력이라고 하는 것은 똑같은 겁니다.

똑같은 다섯 가진데 이 힘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만들어줍니다. 믿음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지혜가 방해를 받는다. 그러면은 믿음과 지혜를 균형을 맞춰줘야 되는 것이고, 집중력이 강해지다가 보니까 노력하는 것들이 자꾸 힘이 딸린다. 그럼 그 균형을 맞춰줘야 하는 것이고, 알아차림을 계속적으로 유지시켜나가 줌으로 인해서 이런 균형들을 맞춰주는 것, 이걸 오력이라고 합니다. 힘은 어떤 경우든 균형을 맞춰주도록 해야 됩니다.

다섯 가지 뿌리라고 하는 오근을 더욱더 개발시킴으로 인해서 오력은 힘을 받습니다.

 

그러고 나서 7가지, 4·4·4·5·5 다음에 7·8 이니까,

7은 뭡니까? 칠각지죠.

알아차림을 개발해나가는 것, 택법각지로 해서 어떤 것이 법에 맞는 것이고, 어떤 것이 법에 맞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 노력하는 것들, 그다음에 기쁨에 대한 것들, 평안함에 대한 것들, 집중에 대한 것들, 그리고 평온함에 대한 것들, 이런 7가지들을 자꾸 개발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8은 팔정도.

몸과 말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 이런 것들을 바르게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들, 중도에 맞게끔 생활해나가는 것들,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서른일곱 가지들이 여러분들의 능력을 키워주는 것들입니다.

그 능력을 자꾸 키워줘야만이 법을 들었을 때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있고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법문을 다니다보면 사람들에 대해서 차별을 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그걸 나쁘다고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거기 법회 가니까 법문을 들을 자세들이 잘 안 되어있다 할 거 같으면 다음부터는 잘 안 갈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가더라도 대충하고 와버린다든지, 그렇다고 스님이 어디 다니면서 보시받고 다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선택을 하게끔 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데는 한 달에 한 번씩 해주라 해도 거기는 가면 그래도 열심히 듣고 그대로 자꾸 실천을 해나가는 것이 눈에 보이면 그다음부터는 한 달에 두 번 내가 일부러 해줍니다. 선택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도 여러분들은 행복한 겁니다 일주일에 보통 세 번은 하니까.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나쁜 겁니다.

 

그런데 법은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도 법을 설하는데 선택을 했거든. 저 사람이 법을 들을 능력이 된다고 할 거 같으면 멀리 있더라도 거기 일부러 찾아가서 법을 설합니다. 근데 가까이 있고 아무리 모여있어도 사람들이 법을 듣고도 그것을 얻을 능력이 없으면 법을 설하지 않고 입을 다물거든. 그건 차별하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적어도 그런 선택된 자들이 자꾸 되어야 됩니다. 법을 설할 수 있게끔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다른 스님들이 여기 와서 법을 설하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어떡하면 좋아요? 여러분들의 능력이 훨씬 뛰어나서 그런 부분도 있을 수가 있지만은 그 스님들 입장에서 봤을 때 법을 지금 설해가지고 이익이 없다 싶으니까 설하지 않는 것도 있을 겁니다.

 

원래 고수들은 자기 것들을 감추는 법입니다. 끓어 넘칠려고 하는 것들은 잘 단도리를 해야만이 끓어 넘치질 않습니다. 여러분들 만약에 끓어 넘친다 할 거 같으면 그걸 잘 단도리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끓어 넘치다 보면 나중에 안에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목요일날 되면 다음주부터 할건가, 이번주부터 할건가? 담마토크, 붓다의 실천심리학 한다고 공지나왔던데 이번주부터 하는 건가, 다음주 부터 하는 건가? 아, 그래요? 그거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물론 스님이 참관을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하는 것이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스님이 답변해주는 것이 있고 하겠지만 말을 많이 하다보면 여러분들이 끓어 넘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조심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단순히 말을 하기 위한 도구로써 법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자기 것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물질에 대해서 배웠다, 마음에 대해서 배웠다, 열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배웠다 할 거 같으면 그 열반이 무엇인지 체험할려고 하고, 물질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할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물질의 종류가 몇 가지가 있고 어떻게 되고 하는 것들을 쭈욱 머릿속에 넣어가지고 그거 어디다 쓸거라?

그렇게 외워만 두면 자꾸 끓어넘치게 됩니다.

 

현명한 자들은 부처님이 선택하게 됩니다. 멀리 있는 금정산이라 하더라도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으면 누구든지 그것을 쳐다보게 돼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자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법문을 하는데 있어서 차별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거기가서 법문하기 힘드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수행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 하더라도 그것이 인자가 돼서 그 사람들이 견해가 바뀌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이교도들하고 법문을 할 때는 거의가 토론 형식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 영원한 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은 아니다, 그것은 틀렸다 하면서 논박을 합니다. 그럼 상대방에서도 아니다 있다 하면서 또 논박을 하겠죠. 내 이렇게 논쟁 위주가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결국은 아, 나라고 하는 것이 영원한 것이 없구나 하고 수긍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런 이익이 있다는 거라. 삿된 견해를 바꾸는 결과를 가져오게끔 됩니다. 적어도 그런 이익은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평상적인 얘기를 합니다. 일상생활 할 때, “그래도 밥 먹을 때 밥 먹는 걸 그냥 알아차려 가면서 수행 안 해도 좋으니까 마음을 평온하게 하라.”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있거든.

 

그래서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너는 밥 먹을 때 어떻게 먹느냐? 말을 하면서 밥을 먹는다 할 거 같으면, 그래하지 말고 밥을 먹을 땐 밥만 먹어라. 그래야만 음식이 뭐가 들어가는지를 알고 뭐가 맛있는지를 분명하게 이해한다. 일상적인 것들을 쭉 그렇게 부처님이 얘기를 해줍니다. 그래서 아, 이렇게 살아가니까 참 마음이 고요하고 집착하는 것이 없이 또 화가 잘 일어나지도 않고 평온하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문답형식을 많이 합니다. 분명하게 부처님이 질문을 합니다.

 

근데 출가한 스님들에게 법을 설할 때는 아주 세세하게 합니다. 법이 어떤 것이고 또 계율이 어떤 것이고, 또 열반이란 게 어떤 것이고 아주 자세하게 해줍니다. 그걸 듣는 사람들은 그걸 듣고만 있어도 금방 깨달음에 이르릅니다. 그 법을 지가 듣든 안듣든 부처님은 아주 열심히 해줍니다. 사람을 선택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들을 자격이 되는 사람들에게응 그렇게 법을 설하는 것이고, 그렇게 들을 자격이 안되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게끔 법을 설한 것 뿐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여러분들도 아주 자세하게 법을 들을려고 할 거 같으면 그런 자격을 갖추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법을 설한 것은 사람은 선택했을지 몰라도 사람을 차별하진 않았고, 그 어떤 사람들에게라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의 진리는 설하지 않고 감추어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뒤에 후대에 그런 얘기를 하죠? 500년 뒤에 부처님이 이거는 중생들이 근기가 안되서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이라 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경도 있습니다.

과연 그게 있을 수가 있을까? 부처님 당시에 법을 설하지 않는 것들이라 할 것 같으면 그때 듣지 못한 것이라 할 것 같으면 500년 뒤에 사람들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속아버린다는 거라.

부처님이 나타내지 않은 진리는 없습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나타내지 않는 진리라고 할 것 같으면 500년 뒤에도 나타날 수가 없게끔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스님들이 쓸데없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면 앗타상히따 라고 하는 겁니다. 효율적인 것들이 되도록 해야 되고, 이익이 있도록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법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있어야 되고,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어떤 경우에 법을 설하든 부처님은 그 부분을 벗어나지를 않았습니다. 단지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익이 없기 때문에 설하지 않은 것입니다.

 

담마토크를 하든 그렇지 않고 또 여러분들끼리 법에 대해서 법담을 하든 그것은 반드시 이것을 벗어나버리면 안됩니다. 앗타상히따라고 하는 것! 이익이 있고 도움이 되도록 해야 되는 것, 그리고 효율적이 되어야 됩니다. '사팔라'라고 그럽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인가, 여러 사람들이 법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인지 아니면 한두 사람이 주제를 발표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의문나는 것들을 답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인지 그것은 각각의 그룹에 따라 틀립니다. 그 효율적인 부분들을 자꾸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똑같은 시간이라도 조금 더 바르게 부처님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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