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법문


*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20090503) -빤냐와로 마하테로

담마마-마까
2021-05-19
조회수 291

https://youtu.be/7BZlZ5gTtBM


*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20090503)  <녹취법문>


부처님 보입니까? 보여요?

우리가 부처님 여기 왜 모셔놓은 거라? 응?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예를 표하기 위해서 이렇게 불상을 모셔놨죠!

또 부처님은 어디 계십니까? 여기 계십니까? 이 앞에? 부처님 어디 계신지 아는 사람? 음? 부처님은 2,600년 전에 열반하셨죠. 돌아가셨단 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불교도가 아니고 다른 종교도라고 할 것 같으면 돌아가신 분에게 예배 올린다고 하는 것은 그거 조금 말이 안 맞는 얘기겠죠?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죠.

 

우리 조상들도 보통 보면 3대 이상은 갈 거 같으면 거 뭐 예를 올린다는 걸 잘 안 합니다. 그러면 2,600년 전이면 몇 대 이상이야? 먼 아득한 옛날인데 그런 돌아가신 분께 예를 올리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리고 세계 어느 종교라고 하더라도 딱 돌아가신 분만 한정해서 봤을 때 그 돌아가신 분께 예를 올리는 법은 없습니다.

다들 돌아가셨지만 다시 환생했다든지 아니면 계속 이 세상에 존재를 하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되어서 그런 분들에게 예배를 드린단 말입니다. 뭐 예수님도 그렇고 모하메드도 마찬가지고 어떤 성인들도 다 마찬가집니다.

 

근데 왜 불교도도 꼭 마찬가지로 이렇게 부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가? 다른 종교인들이 봤을 때는 말이 안 맞거든. 자기들은 신이기 때문에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형태인데 분명히 불교는 부처님은 신은 아니라고 얘기를 했단 말이라. 신은 아니고 틀림없이 2,600년 전에 열반하신 분이라고 얘기를 한단 말이라. 부처님이 어디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존경의 예를, 에배를 드리는가?

 

그 부처님에 대한 게송 중에 ‘천인사’라고 하는 게송있죠? ‘삿타데와마눗사낭 붓도 바가와(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 마지막 부분에 나오죠?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다. 인간의 스승만 되는 것이 아니고 천상에 있는 신들의 스승이라는 거라. 신들도 어려운 게 있으면 부처님한테 와서 묻고 그래서 바른 답을 구해가고 했다고 그럽니다.

신은 우주의 어디에든지 존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신이 다른 종교에서는 다들 최고라고 얘기를 합니다. 뭐 그게 하느님이든 아니면 범천이든 예수든 어쨌든 그런 신들은 다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거 같으면 부처님한테 예배드리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그 신이라는 것도 불교적으로 얘기하면 부처님의 제자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 이 사실을 간과해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신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은 신이 최고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죽음 이후에도 천국이나 극락이라는 곳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싶다고 하는 그런 영원불멸의 존재를 상정을 하게 됩니다. 그거는 인간이 내가 죽고 싶지 않다. 영원히 존재하고 싶다 하는 갈애로부터 사실은 생깁니다. 부처님이 거기에 대해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변화하고 쇠약해서 결국은 죽게 돼있다. 천상에 있는 신도 예외는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모든 신들도 부처님의 제자일 뿐 아니라 그 신들조차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인간이 과연 그 신들의 스승이 될 수 있는가? 다른 종교의 논리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겠죠? 근데 불교적인 논리에서는 틀림없이 신들의 스승이 부처님입니다. 그렇지만은 부처님은 인간의 몸입니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하느님이라든지 아니면 신의 사자라든지 이런 말을 부처님이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은 어쨌든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어서 신들의 스승이 되신 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다시 이 세상에 환생했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또한 부처님이 다른 부처님의 환생이었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 그전 훨씬 이전의 세상에서도 부처님이 존재를 합니다. 그래서 과거칠불이라는 얘기들이 있죠? 그렇지만은 그 부처님의 환생이라고 얘기한 적도 없다는 거라. 단지 이생에서 무수한 생에서 지어온 바라밀, 바라밀의 선근공덕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고 덕행을 갖다가 이룬 분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데와 마눗사낭(deva-manussānaṃ)’ 마눗사라고 하는 거는 보통 그걸 ‘인간’들이라고 그렇게 표현들을 합니다.

마눗사라고 하는 것은 의미파악을 해보면 ‘마나(mana)’라고 하는 ‘의식·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눗사’라고 하는 것은 이 ‘마음을 완전하게 기를 수 있는 인간’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인간만이 이 마음을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완전하게 증장시킬 수 있다 하는 의미입니다. 데와(신)도 할 수가 없고 다른 어떤 존재들도 할 수가 없는데 인간만이, 그래서 마눗사라고 하는 인간만이 마음을 완전하게 기를 수 있다 하고 하는 겁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중에서 이 마음을 궁극의 곳까지 이르도록 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생명은 인간 이외에는 없다고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마눗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간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마눗사만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눗사 중에 한 분이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천상세계에 있는 어떤 신들도 그런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들의 스승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그래서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그런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것 같으면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 됩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각각의 천신들이 와가지고 그 제자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답을 구해서 가고 하는 것들이 경전에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가끔씩 다른 종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그런 부처님인데 그것을 불교도들은 믿고 있단 말이라. 그러면 불교도들은 뭘 믿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확한 답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왜? 내가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지를 않았기 때문에! 또 내가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그거는 내가 확인되지 않는 것들은 믿을 수가 없는 거라는 거라. 내가 확인돼서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신이 섰을 때 믿게 되는 것이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에서는 믿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거는 불완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불교도들은 엄밀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아무것도 믿지 않는데 여러분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들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이 자리에 와서?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또 그것을 배우고 실천해서 그것을 체험할려고 하고 그러고 있다는 거라.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믿기 위해서 불교도들은 이 세 가지를 하고 있다는 거라.

먼저 이해하는 것. 빠리얏띠(pariyatti)라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실천하는 것. 빠띠빳띠(paṭipatti)라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체험하는 것. 빠띠웨다(pativedha)라고 그럽니다.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서 체험하는 것들을 하고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바로 그걸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또 수행법을 배우고 해서 그것을 직접 수행하고 또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그러고 나서 아, 그래서 부처님 말씀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하고 확신이 들고나면 아, 그래 이것은 내가 해야 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다 하고 확신을 하게 되는 거라.

또 수행에서도 아, 이게 부처님 말씀대로 가는 길이 꼭 맞구나. 이 방법만이 오직 바른 길이구나 하고 체험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첫걸음, 처음이 뭡니까? 정견(正見)이라고 해서 바른 이해! 바른 이해가 바탕이 돼서 다른 것들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하느님의 은혜가 있기를 하고 사람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근데 불교도들은 어떻게 합니까? 부처님의 은혜가 있기를 하는 용어는 좀처럼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대신에 뭘 얘기합니까?

붓당 사라낭 갓차미(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 나는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 노력하는 것에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갓차미, 사라낭 갓차미 라고 하는 것은 나는 의지한다 라고 하는 것, 귀의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 가르침을 갖다가 배워서 따르겠다 라고 하는 의지표명입니다. 그것을 그냥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의존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도록 의존하는 거라. 뚝딱하고 도깨비방망이 같이 베풀어주는 것을 얘기하는데 갓차미라고 하는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스스로 배워서 실천해서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의지해서 나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대신해서 실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왜 그러면 우리는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다 하고 얘기를 하는가? 부처님이 과연 어떤 분이기에 그런 얘기들을 하는가 하는 거라.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처음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다.”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를 않는다 하는 뜻입니다. 그 윤회의 생들이 너무나 힘들고 무수했지만은 그 윤회의 고리를 갖다가 끊어버렸다는 거라. 그래서 이젠 다시는 이런 윤회하면서 일어나는 괴로움들은 일어나지를 않는다 하는 거라. 부처님이 인젠 이게 마지막 생이라는 거라. 인젠 다시는 이 세상으로 오지를 않는다는 거라.

 

부처님은 살아가면서 그리고 과거 전생부터 이어지는 삶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들이 무수하다는 걸 압니다. 그 괴로움을 갖다가 이해해서 그 괴로움의 고리를 갖다가 끊어버렸다. 그래서 윤회를 끊어버렸다 하는 거라. 그걸 우리가 일반적으로 열반이다 해탈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해탈·열반이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겁니다.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갖다가 풀어버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존재하는 한은 이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넘을 수가 없다 하는 거라. 그래서 괴로워하지 않을 거 같으면 최선의 방법은 뭐라?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거라. 태어나지 않는 것이 완전하게 끊는 거라. 그러니까 그걸 그 진리를 부처님이 알았기 때문에 이게 마지막 생이다. 다시 안 태어난다는 거라.

 

단지 신의 은총만을 기대하고 헌신하는 것만으로써 마음을 완전하게 기를 수 있는가? 마음을 완전하게 기를 수 있는 게 인간이라고 했는데 마음을 기르지 못할 거 같으면 당연히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거라. 헌신만으로는 결코 바른 정견과 지혜를 얻을 수 없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신의 은총, 아니면 부처님의 가피력만 바라가지고는 그 어느 곳에서도 바른 견해를 얻을 수도 없고 지혜를 얻을 수도 없다 하는 거라. 결국은 마음을 완전하게 기를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뭐라고 그럽니까? 부처님께 예경하고 싶은 사람은 꽃을 올리거나 나에게 비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한 가르침을 하나라도 실천하라. 그것이 부처님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은 단지 비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말한 길을 실천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 박꿀라 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시간만 나면 부처님 앞에 가서 이렇게 부처님을 예경하는 거라. 부처님을 이렇게 보는 것이 그렇게 환희심이 나는 거라. 태국에 있을 때도 내가 그랬습니다. 여기 얼굴도 잘생기지 못한 스님이지만은 그래도 잘 살아간다 싶으니까 어느 출가한 여자분이죠. 거기서는 ‘메치’라고 그럽니다. ‘청신녀’ 같은 그런 성격인데 팔계를 지키면서 살아갑니다. 거기 태국에는 비구니가 없기 때문에 한 분이 만날 내 방문 앞에 와서 이렇게 만날 보고 가고 그러고 나서 없으면 나는 문을 잠그는 법이 없으니까 만날 방청소 하고 가고 이렇게 했어요. 굉장히 부담스러운 거라. 부처님도 아마 이 박꿀라가 와서 만날 부처님을 보고 가니 부담스러울 거야.

 

왜 그렇게 만날 와서 나를 이렇게 보고 가고 그러고 만날 내 이런 소지품들도 정리를 하고 이렇게 하느냐? 박꿀라는 그게 행복이라는 거라. 나는 그거 이상 가는 게 없다는 거라.

이 썩어빠질 이 육체를 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진정한 부처님의 의미를 볼 수가 있겠느냐? 이 내 몸만 본다 해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하는 붓다는 이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담마, 담마를 이해하는 자만이 진정한 붓다를 뵐 수가 있는 것이다 하고 박꿀라한테 얘기합니다. 부처님 육신도 어차피 변해가고 늙고 병들어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거 예경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담마를 이해하는 것만이 진정한 부처님을 뵙는 거라는 거라.

 

여러분들의 앞에 있는 불상도 마찬가집니다. 적어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저것도 변하는 것에는 틀림없다는 거라. 그래서 어떻게 해요? 세월이 지나면서 변하니까 녹도 슬고 가사도 벗겨진 거까지 보이니까 보기 싫으니까 어떻게 해요? 개금하는 거라. 여러분들 개금하듯이 개금하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저게 안 변하느냐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변한다는 거라. 육체 물질적인 저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만으로써는 절대 부처님을 볼 수가 없다는 거라. 그 부처님이 말한 진리를 이해해야만이 분명한 부처님을 뵙게 된다는 거라.

 

인도 역사에서 불상은 한 오백 년 가까이 만들어지지를 않습니다. 부처님은 자기의 불상을 만드는 것을 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상이나, 인물상이죠? 여러 가지 상들을 갖다가 만든 것은 그리스인들입니다. 지금의 서양이죠. 그게 인제 불교에 전파가 돼가지고 불상이 만들어져서 인제 지금 불교도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고 나서 오백 년 동안 불상이 안 만들어진 상태에서 경전에는 수백 년이라고 되어있는데 아마 오백 년 이전이겠죠? 한 사백 년이나 뭐 이 정도 됐겠죠.

 

우빠굽따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이 우빠굽따 스님이 굉장히 유명했던 스님입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있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법을 들을려고 하고 또 실천할려고 하고 또 막 출가를 하고 이리됩니다. 마라가 보니까 아, 이거 큰일나겠는 거라. 부처님 한 분이 출현해가지고도 이렇게 마라의 영역이 많이 좁혀졌는데, 이 우빠굽따라고 하는 스님이 출현을 해도 부처님을 버금가는 그런 역할들을 하고 있는 거라. 이미 한 사백 년 정도 되면 거의 불교가 자취를 감추다시피 합니다. 거의 힌두교화되다시피 하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오직 이 우빠굽따만이 그런데 물들지 않고 힌두교도 하지 않고 그냥 부처님 말씀만을 전하고 가르치고 수행을 갖다가 하도록 만드는 거라.

 

그래서 이 마라가 우빠굽따가 설법하는 곳 앞에 가서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꽹과리판을 한판 벌립니다. 사람들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빠굽따 스님한테 가서 법문을 들으러 가다가도 저기에 뭐가 끌고 있으면 거기에 폭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앞에서 뭐 노래자랑도 하고 뭐 여러 가지 쇼도 하고 이렇게 하니까 스님한테 가는 게 아니고 거기 가 홀랑 빠져버려가 있는 경우들이 있는 거라. 가만히 우빠굽따 스님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이 아무도 안 오거든. 뭔 일인가 해서 앞에 가보니까 마라가 그 앞에서 그렇게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

 

우빠굽따 스님이 이 마라에게 목거리를 걸어주면서 아, 참 당신 잘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저렇게 즐거움을 주는데 나는 그렇게 즐거움을 못 준다. 참 당신은 즐거움을 주고 있으니까 아이고 참 고맙다 하면서 목걸이를 탁 걸어줍니다.

마라가 얼떨결에 그 목걸이를 받았어. 목걸이를 받았기는 받았는데 이 목걸이가 점점 더 조여져 오는 거라. 뱀이 형상으로 변화되면서 목을 점점 더 조여오는 거라. 죽을 판이 되는 거라. 그래서 천신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하느님한테 부탁을 합니다. 하느님이 이걸 뗄래도 뗄 수가 없는 거라. 그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인데. 안 되겠다 싶어서 가장 힘이 쎈 범천 신한테 가서 이것 좀 떼주시오. 나 좀 살려주시오. 살려주면 나는 당신에게 뭐든지 다 해주겠다.

 

이거 떼 낼 방법이 없는 거라 그 범천신도. 모든 신들한테 다 가서 해도 방법이 없는 거라. 신이 얘기하는 게 뭐냐 하면 그 장식을 벗을려고 할 거 같으면 목에 걸쳐준 사람만이 그걸 벗겨줄 수가 있다 하는 거라.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라.

왜? 내 능력이 그 우빠굽따 스님에게 못 미치기 때문이라는 거라. 신의 능력이 하나의 스님의 능력에 못 미친다는 거라. 못 벗겨준다는 거라. 할 수 없어서 마라가 우빠굽따 스님한테 가서 얘기합니다. 제발 이거 좀 벗겨주시오. 그러면 내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그래 그럴 것 같으면 내가 말한 두 가지를 충족시켜주면 내가 그걸 벗겨줄게. 예, 말씀십시오. 내가 틀림없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 주겠습니다.

 

간단한 겁니다.

첫 번째가 뭐냐 내가 부처님 말씀을 설하는 곳에 와서 깽판치지 마라. 쉽게 말하면. 방해하지 마라는 거라. 왜 바르게 법을 갖다가 전해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와가지고 마음을 혼란하게 하느냐는 거라.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마라가 있을 거라. 아, 저 스님 말이 맞나? 다른 스님들은 안 그러던데. 마라가 장난하고 있는 거라.

그래 그거 하겠습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너는 부처님 당시 때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부처님 이후에도 벌써 몇백 년을 살아왔다. 그러니까 니는 부처님 모습을 안다는 거라. 그 부처님 모습을 내를 통해서 한번 보여도. 우빠굽따 스님도 부처님을 못 뵀거든. 몇백 년이 지났으니까. 얼마나 부처님이 뵙고 싶겠어?

“한번 보여도!”

이 두 가지만 해달라는 거라. 마라에게는 결코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거라. 마라는 오만 걸 다 변화시키고 자기 자신이 변화되고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겠다. 그 뭐 어려운 게 아니니까. 다음부터는 다시는 당신 설법하는데 나서가지고 내가 장난하지 않겠다. 그리고 지금 부처님 모습을 나를 통해서 내가 보여줄게. 단 조건이 내가 부처님이 아니니까, 마라는 부처님이 아니니까 적어도 나를 보고 예경은 하지 말아라.

“그래 그러마.”

그래가지고 이 마라가 부처님 모습으로 변합니다. 근데 이 우빠굽따 스님이 거기에 대고 예경을 하는 거라. 마라가 깜짝 놀래가지고 “나한테 예경하지 말라 그랬는데 왜 예경합니까?”

 

우빠굽따 스님이 그럽니다. “나는 마라 당신에게 예배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에게 예배한 것이다.” 불상에 대해서 예배하는 것은 불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예경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상징인 이 불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이 부처님을 불러넣기 위해서 예경하는 것이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 불상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영국이 한참 세력을 넓히고 할 때 버마, 인도 이런 데서 많은 불상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당시 윈스턴 처칠이 수상이었죠. 어느 장군이 이 불상을 갖다가 윈스턴 처칠한테 보내주면서 그렇게 글을 적어놨습니다. 이 불상을 갖다가 당신 책상 앞에 놓아두시오. 그러면 마음이 불안하고 혼란할 때 이 불상을 바라봐라. 그러면 이 불상의 온화한 모습으로 해서 당신 마음도 온화해질 것이다. 하고 적어가지고 보냅니다.

 

인도 수상 네루 같은 경우도 호주머니 속에 항상 불상을 넣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음이 혼란하고 또 힘들 때 불상을 꺼내서 봤다는 거라. 불상이 하는 역할들은 굉장히 많이 있지만은 대표적인 게 힘들고 또 마음이 또 혼란스럽고 할 때 그것을 봄으로 인해서 마음을 온화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역할들을 많이 해왔습니다.

아마 세계 각지의 박물관에 있는 불상들을 보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꼭 불교도가 아니고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대영박물관에 불상들을 보더라도 그 앞에 가면 대부분 그런 마음들을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어떤 경우에는 좀 필요한 그런 존재 그런 불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꼭 불상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불상 앞에서 그 불상이 의미하는 부처님을 숭배하는 것들도 아니고,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어떤 것도 요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꼭 불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불상은 그 부처님을 향해서 예경드리는 도구로써 그리고 존경하는 도구로써는 필요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집에서들도 불상을 갖다 놓고 하고 아니면 불상이 없으면 그런 그림이라도 갖다 놓고 하고 그렇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잘못돼가지고 성스러운 불상을 왜 집에 모시느냐 해가지고 절로 가져오기도 하는데 그거는 굉장히 잘못된 것들입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걸 하나라도 불상을 더 봄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온화해지고 또 그 분의 삶을 따를려고 마음을 먹을 것 같으면 불상은 그것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겁니다. 진정한 부처님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신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불상이라는 이 물질적인 것도 진정한 부처님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진리는 존재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 했어요? 내가 발견한 진리는 오래된 길을 갖다가 찾은 것뿐이다. 이 진리는 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거라. 단지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가시덤불 헤쳐가지고 가보니까 거기에 존재를 하고 있더라는 거라. 원래부터 있더라는 거라. 부처님이 출현하든 하지 않든 진리는 있다는 거라. 이 세상에 존재를 한다는 거라. 단지 그 진리를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걸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준 것뿐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그 진리를 발견했던 분들도 옛날에 있었다는 거라. 그것이 과거 부처님들이라. 그 과거 부처님이 내가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진리를 발견한 것도 아닌 거고, 그리고 내가 천상 신이라서 내려와가지고 그걸 진리를 발견한 것도 아니라는 거라.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하다 보니까 그 진리를 발견한 것뿐이라는 거라. 진리는 부처님이 있든지 없든지 존재를 한다는 거라. 세상이 변해간다는 거 그거는 부처님이 없어도 있는 진리라는 거라.

 

부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가끔씩 물어봅니다. 부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 깨달음을 이룬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라. 저 천상에 있으면서 모든 걸 관장을 하고 있는 그런 존재도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우리가 그 부처님한테 부처님을 숭배함으로 인해서 그 천상의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는 부처님이 뚝딱 이렇게 뭘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아예 그러면 일반인과 같이 2,6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영향을 못 미치느냐 그것도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이라는 것은 결국 진리를 깨달은 분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우리가 깨달으면 내가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열반 후에 사백 년이 넘어 지난 후에 태어났던 그 장로 스님도 마라를 통해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예경을 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2,600년이 지나고 나서 이 불상을 통해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예경을 드리라는 거라. 근데 예경드리는 대상은 물질적인 존재로서의 부처님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담마로써! 진리를 발견하면 그와 같다는 거라.

 

이 전기를 발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그게 누군지 모릅니다. 에디슨인지 뭔지는 모르는 분인데 어쨌든 누군가가 이걸 발견했다는 거라. 근데 우리가 지금 이 전기를 쓰고 있어. 전기를 쓰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이 발견한 사람이 누군가 하고 알 필요가 있느냐는 거라.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어디 계신가 하고 알 필요가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를 갖다가 내가 유용하게 쓰면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거라. 부처님도 그 어떤 신도 인간의 죄를 갖다가 사해줄 수 있지 않다는 거라. 맑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거라. 내가 죽음이 다가왔을 때 당신 신을 믿습니다. 이런다 해가지고 그 죄가 사해질 수 있느냐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내가 지금 만약에 화내는 성질이 있다 할 것 같으면, 내 지금 당신을 믿을테니까 급한 성격 좀 없애주시오 할 것 같으면 신이 고쳐주어야 되는 거라.

죽을 때 고칠 수 있는 신이면 왜 살아있는 사람들 그걸 못 고쳐주느냐는 거라. 그거는 아니거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서 급한 성격을 고치는 거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서 화나는 것들을 고치는 겁니다. 다른 길이 없다는 거라. 화내고 성질내고 하니까 그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 불행하게 하는데 그게 위험한 것이라는 걸 아니까 어떻게 해요? 내가 화를 안 낼려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부처님도 그 어떤 신도 자신이 저지른 행위, 죄에 대해서 그것을 사해줄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거라. 단지 자기가 행한 선한 행위로 인해서 지어온 죄들을 그 결과들을 극복할 수는 있다 하는 거라. 앙굴리말라라고 하는 사람이 999명을 죽였지만은 부처님으로 인해서 출가해서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죄는 벗어날 수 없지만은 더 좋은 덕행들을 쌓음으로 인해서 그걸 극복하는 거라. 그렇지만은 부처님도 그 죄를 갖다가 사해준 것은 아니라는 거라. 자기 스스로 노력으로 인해가지고 그걸 극복한 것뿐이라 거라.

 

부처님이 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의 진리를 되바라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아무 곳에도 없는 부처님에 대해서 예경할 필요도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 또 너무 허무한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담마를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라” 담마가 곧 부처님이기 때문에! 담마를 깨달은 분이 곧 부처님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 담마를 깨닫도록 하라는 거라. 어떻게?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그래서 담마를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라는 거라.

 

부처님이 어디 계신가 하고 물을 때 열반이라고 하는 고정된 장소, 천상이든 어디든 그런 곳에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지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깨달으면 곧 부처님이 여러분들 가슴속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이뤘던 사람들도 부처님을 그렇게 존경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깨달음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도 부처님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 것보다 부처님이 가르친 담마를 갖다가 실천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고 그 담마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그 담마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준 부처님에게 예경한다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그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여러분들 가슴 속에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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