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법문


20201221.테라와다불자의 기준점-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께서 (사)21세기불교포럼에서 설하신 법문입니다.

담마마-마까
2021-05-07
조회수 303

※ 아래의 필사 법문은 <초기불교/테라와다불교 공부방 오픈채팅, 필사 봉사자 모임>에서 필사해서 올려주신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참된 가르침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지혜와 자비가 함께하기를 두손모읍니다._()()()_ 


https://youtu.be/5HL4fPcoU5k


<마하망갈라숫따 Mahāmaṅgalasutta>(숫따니빠따 2.4.축복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네.

어느 한때 부처님께서 사왓티에 있는 아나타삔디까의 제따 숲 수행처에 계시었네. 그때 밤의 반이 지난 한밤중에 한 천인이 밝고 아름다운 빛으로 제따 숲 전체를 환하게 비추면서 부처님의 처소 아래 이르렀네.

가까이 다가가서 부처님께 공손하게 인사드리고 한쪽 옆에 물러섰네.

한쪽 옆에 서있던 그 천인이 부처님께 게송 읊어 여쭙기를:

 

“많은 천인들과 인간들은 모든 축복에 대해 사유하나니,

부처님이시여! 간절히 바라고 행복을 가져오는

으뜸가는 축복이 무엇인지 설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네]

 

어리석은 자를 멀리하고,

지혜로운 자와 어울리며,

존경해야 할 분들을 존경하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적당하고 즐거운 장소에서 살아가고,

이전에[전생에] 쌓은 공덕들이 있으며,

자기 자신 올바르게 확립하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널리 배우고 바른 기술 익히며,

몸과 마음 계율로써 잘 다스리며,

선한 말로 의미 있게 말하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부모님을 효도로써 잘 모시고,

처자식을 사랑으로 보호하며,

안정된 직업으로 평화롭게 일하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널리 베풀고 담마 따라 살아가며,

형제친척들과 화합하며 서로 돕고,

비난받지 않는 일을 행하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악한 행위들을 피하고 삼가며,

술과 약물 자제하고 멀리하며,

선한 행위 따라서 방일하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존경할 줄 알고 겸손하며,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며,

적당한 때에 담마를 듣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인내하고 공손하게 경책들을 받아들이며,

수행자를 찾아뵙고,

적당한 때에 법담을 나누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부지런히 노력하고 청정범행 수행하며,

성스러운 진리들을 분명하게 통찰하고,

닙바나에 이르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세상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슬픔 없이 번뇌의 오염 없이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누구라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잘 실천해 나아가면,

어디서나 실패하는 일이 없고,

어디서나 행복을 얻게 되니,

이게 바로 으뜸가는 축복이라네.

 

- ‘(사)한국테라와다 불교의범’ 번역본

https://blog.naver.com/keh6843/222159866229 (자세한 뜻풀이)

 

 

<마하망갈라숫따>를 읽었는데, 망갈라(Maṅgala)의 뜻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축복, 행복. 실제로는 망갈라라는 의미는 잇디까라나(iddhikāraṇa = 번영을 위한 행위), 웃디까라나(vuddhikāraṇa = 발전을 위한 행위), 삽바삼빳띠까라나(sabbasampattikāraṇa = 완전한 성취를 위한 행위)라고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Maṅgalanti iddhikāraṇaṃ vuddhikāraṇaṃ sabbasampattikāraṇaṃ. = “maṅgala란 번영과 발전과 완성의 조건이다” <숫따니빠따 주석서>]. 근데 그걸 통합을 해보면, 실제 여러분들에게 축복이 오고 행복이 오는 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축복이나 길상이나 행복이 오도록 여러분들이 노력하는 행위가 망갈라라는 뜻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불교는 실천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것이 오도록, 축복이나 행복이 오도록 여러분들이 열심히 노력할 때 그것 자체가 망갈라다,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 자리에 온 것도 망갈라죠? 맞습니까? 망갈라가 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까 보니까 ‘아닛짜 와따 상카라 웁빠다 와야 담미노 웁빠지뜨와 니루잔띠 떼상 웁빠사모 수코’(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 = “형성된 것들은 참으로 무상하여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법, 일어났다가는 소멸하나니 이들의 가라앉음이 행복이로다.” <D16.대반열반경>)라고 하는 게송을 하더라고. 테라와다불교하고 한국에 있는 대승불교하고 가장 많이 차이 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이 죽고 나서 스님을 초청할 때 무슨 목적으로 초청하느냐 하는 겁니다. 죽은 사람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초청하는 건지. 아니면 나도 죽으니까 죽음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스님을 초청하는 건지. 차이가 커집니다.

 

그래서 아까 같은, ‘아닛짜 와따 상카라’라고 하는 거는 대부분 언제 하느냐 하면, -테라와다 기준으로 얘기합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스님을 초청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스님께 공양 올리기 위해서. 그다음에 스님한테 가사를 올리기 위해서. 또 하나는 스님에게 법문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근데 죽은 사람한테 법문을 들려줄 수도 없고, 죽은 사람이 공양 올리거나 가사를 줄 수도 없습니다. 누가 합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이 하지요. 살아있는 사람들이 하면서 ‘이 공덕을 돌아가신 분께 회향합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때 스님들이 읊는 게송이 조금 전의 그 게송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살아있죠? 근데 여러분이 죽음에 딱 이르렀다, 그러면 숨이 딱 끊어집니다. 살아있는 사람하고 죽은 사람하고 차이가 뭘까? (청중: 숨을 안 쉽니다) 멸진정에 든 사람도 숨을 안 쉽니다. 그게 차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없습니다. 흩어져 버려요. 그래서 죽음에 이르게 되면 그 죽은 사람은 마음이 흩어져 버리고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못하게 된다. 그걸 이제 스님들이 ‘앗찌랑 와따양 까요’(Aciraṃ vatayaṃ kāyo pathaviṃ adhisessati, Chuddho apetaviññāṇo niratthaṃva kalingaraṃ = "머지 않아 이 몸은 땅에 눕혀지리니, 의식 없이 버려진 쓸모없는 나무 조각처럼" <법구경 게송 41>) 하면서 하는 게송을 해줍니다.

 

여러분은 언제 죽을지 모르죠? 이대로 살아도 됩니까? 한번 본인이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진짜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지. 잘 살고 있는 건지. 아니다 싶으면 본인이 빨리 ‘어, 불교는 내가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만큼 본인에게 축복이나 행복이나 길상이 따라오는 것이다’라고 숙고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해지고 싶으면 빨리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따라 해야 합니다. 따라 하지 않고,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고, 또 아무리 좋은 일들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본인 것이 되지 못하면은 의미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냥 화나는 대로 화내고, 욕심부리고 싶은 대로 욕심부리고. 지금은 잘 살고 있는 것 같죠. 근데 그 탐진치는 누가 받습니까? 본인이 받아야 됩니다. 자신 있어요? 그거 받을 자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빨리 ‘아, 내가 이대로 살아서 되는가’ 하는 걸 다시 한번 되돌아 봐야 되는 거라. 사람이 돌아가셨을 때 테라와다 스님들을 초청하는 이유가, 그 게송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겁니다. 너도 숨을 쉬고 있지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숨, 끊어지고 나면은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못하게 된다. 빨리, 그래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하고 있을 동안에 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하라. 뭘 해야 될까, 여러분들이? 가장 좋은 게 해탈하는 것이 가장 좋겠죠. 근데 해탈 금방 할 수 있습니까? 아까 OOO님은 소따빤나(수다원),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얘기를 하시던데. 죽을 둥 살 둥 해도 이룰 둥 말 둥 합니다. 성인의 경지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것 같으면, 아마 지금 같은, 승단이 재가자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사회는 오진 않았을 거라. 적어도 출가한 스님들을 보고 참 부처님같이 살고, 부처님 법을 변경됨이 없이, 자신의 견해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해주고 있구나 하는 걸 느끼고,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만 보면 존경심이 절로 나오도록 되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적어도 출가한 스님들 중에서는, 적어도 수다원에 이른 사람들은 몇 명은 좀 있어야 될 것 아니라. 그렇지 않아요?

 

그 스님만 보면 존경심이 절로 나오게 되고. 왜 그럴까? 수다원이 이르면 뭐가 떨어진다 그랬어요? 족쇄 세 개가 뭔데요? (청중: 유신견, 계금취, 의심) 저 스님에 대해서 다신 의심하지 않는 마음이 듭니까? 믿고 따를 때는 그런 의심 안 하겠지. 근데 조금만 잘못하면 ‘어, 진짠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스님한테서 아직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본인이 본인의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출가한 스님들은 해야 할 일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부처님에게 붙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아, 부처님이 진짜 존경할 만한 분이구나.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구나. 나는 그대로 따라야 되겠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스님들이 필요한 겁니다. 본인이 스승이라고 생각해버릴 것 같으면 그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나는 그것을 연결해주는, 먼저 부처님을 배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여러분들을 부처님한테 붙여줄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출가한 스님들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배우고 있는 불교도, 감히 제가 얘기하는데 출가한 스님들이 없었으면 여러분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걸 오롯이 전해주는 임무를 지니고, 그 역할을 꾸준하게 2천 년 넘어 기간 동안 해왔던 겁니다. 그래서 그 역할만 한 것으로도 우리는 스님들한테 참 고마움을 느끼기는 해야 됩니다. 근데 하도 요즘 스님들이 스님 역할들을 못 하다 보니깐 그걸 보는 것들이 붓다와 담마와 다르게 상가를 보게끔 되는 것뿐입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이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Buddhaṃ saranaṃ gacchāmi, Dhammaṃ saranaṃ gacchāmi, Saṅghaṃ saranaṃ gacchāmi =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마[법]에 귀의합니다, 상가[승단]에 귀의합니다) 했죠. 왜 합니까, 저걸? 여러분들도 그런 스님들이 자꾸 만들어지도록 해줘야 됩니다.

 

제가 여기서 그리 멀지는 않은 곳인데, 울주에 있습니다. 가끔씩 여자분이 전화 와서 ‘스님 한번 찾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전화가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 옵니까? 누구 누구 옵니까?’ 그러면 ‘혼자 옵니다.’ 그러면 ‘오지 마십시오.’ 그분은 당장 수행문답도 해야 되고 의문나는 것도 많아서 죽을 것 같은데, 스님은 오지 말라고 그래. 여러분들 같으면 쫓아가겠죠. 그러면 스님은 문을 딱 잠가버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단둘이, 스님과 여자분이 둘이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계율이. 그래서 ‘반드시 올 때는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스님이 법문하는 때나 법회가 있을 때 오십시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참, 한국에서 출가자로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면, 편안하게 여러분들과 만나서 얘기하고, 여러분들과 뭐 사회 돌아가는 것들도 얘기를 하고 그러면 참 좋겠지만은 그걸 할 수가 없습니다, 출가한 스님이. 지금 있는 그 <붓다의 길 따라 선원>도 풀이 자라 있어도 풀 하나 제 손으로 못 뽑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냥 죽이지 마라, 살아있는 생물을 죽이지 마라, 하는 계율이 적용되지만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풀조차도 못 뽑게 합니다. 어쩔 때는, 처음에 출가했을 때는 그게 굉장히 숨 막혔어요. 근데 이제 생활화되고, 또 지내다 보니까 그거같이 좋은 방호막이 없어요. 참, 나를 보호해주는 방호막들이 잘 쳐져 있구나. 그래서 그 생각만 하면 ‘부처님 고맙습니다.’ 남들에게 드러내고 나타내보이고 하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는 그래도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갈 수 있는 벽을 쌓아줬으니까.

 

내가 남들에게 좀 더 유명해지지 않으면 어때서, 그게 뭐 대수라고. 그것도 다 무상한 성품인데. 출가한 스님들을 출가자답게 살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몫입니다. 명심해주시길 바랍니다. 자, 오늘은 교재를 준비해 왔습니다. 테라와다 불자의 기준점이라는, 여기서는 초기불교라고 이야기하죠? 초기불교하고 테라와다불교하고 뭐가 차이 날까. 근본불교하고 테라와다하고 무슨 차이가 날까. 아니면 상좌부 불교.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까, 테라와다의 기준점은? 옛날에는 빨리어 삼장에 있는 것은 다 초기불교다, 아니면 근본불교다, 테라와다불교다. 뭐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인도 북서부에서 갖가지 문헌들이 자꾸 발견되고 있습니다.

 

설일체유부의 문헌들, 경량부의 문헌들, 뭔가 조사를 해보니 공통점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그런 공통점이 있었겠죠? 추측해보기로. 그래서 그 공통점이 적어도 부처님이 말씀한 것이다,라고 얘기는 할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참 힘든 일이죠. 그건 여기 계신 교수님이나 학자들이 할 일이지, 출가한 스님들이 할 몫은 아닙니다. 단지 저는 이 옷을 입고 있는 테라와다 스님입니다. 그러면, 테라와다 스님 입장에서 여러분들한테 테라와다 불교를 전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것이 꼭 다른 곳, 대승불교나 아니면 다른 것들을 지향하는 곳들과 일맥상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처음에 할 때 보통 스님들이 게송을 많이 읊어주면서 시작을 합니다. ‘자얀또 보디야 물레 삭까야낭 난디왓다노’(Jayanto bodhiyā mūle. Sakyānaṁ nandi-vaḍḍhano. = 보리수 아래서 부처님 되어 싸키야 족에게 기쁨과 자긍심을 주었듯. <자따까, vol. vii. No. 538. 위대한 승리를 축복한 게송>) 하면서 쭈욱 읽어줍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면 지금 여러분들이 있는 시간, 여러분들이 여기서 강연을 듣는 것, 또 마음을 이 소리에 기울이는 것, 이 시간만큼 소중한 시간은 없다.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잡념이 생깁니까? 악한 마음이 생깁니까? 그러면 지금 현재 이 시간에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게송을 하는 것은,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할 것은 오로지 소리 듣는 데만 집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거 하지 말고 아무리 번잡스런 일이 있고 또 사고해야 할 것, 저 말이 맞나 안 맞나, 그건 나중에 하고 지금은 그냥 말 듣는 데에만 집중해보십시오. 마음이 그렇게 고요해질 수가 없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아무 생각 없이 그것만 해도 굉장히 편해집니다. 숨 몇 번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데도. 근데 소리 듣는 거는 지속적으로 계속 들어야 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지면 그 소리가 그렇게 잘 들릴 수가 없습니다. 설혹, 내가 사띠의 힘이 약해가지고 내용을 까먹을지라도 들었을 때만큼은 평온하고 고요해지는 거라. 그게 망갈라(Maṅgala, 축복)라는 뜻입니다. 시작을 할 때는 항상 여러분들이 집중하는 버릇들을 자꾸 들이도록 해보십시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테라와다의 기준점이라 하는 것은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테라와다 불자의 기준점은 따로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가끔씩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스님은 논장을 인정하십니까, 또는 스님은 부처님이 어떤 기이한 현상들이나 선정에 든 것들에 대해서 형이상항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것들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또는 경전에 보면 결집 이후에 써진 부분들이 틀림없이 존재하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합니까? 하고 이야기합니다. 학문적으로 따지면 그것을 설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분명합니다. 적어도 제가 테라와다 스님이듯이 여러분들이 테라와다 불자가 되기 위한 기준점은 분명하다는 것. 부처님 이후로 결집이 6번 이루어졌습니다. 1차 결집, 2차 결집, 3차 결집, 해서 6차 결집까지 이루어졌습니다. 결집한 분들은 아라한이라고 믿습니다. 또는 아라한에 버금가는 큰 장로스님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한두 분도 아니고 수백명 수천명이 모여서 하나로 통일한 것들, 내용이 서로 1차나 2차나 3차가 지나면서 내용이 조금씩 바뀔 수는 있습니다. 근데 결집으로 못박아지는 것은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결집을 통해서 변경하기 전에는.

 

그러면 6차 결집까지 오면서 경율논 삼장은 테라와다의 소의경전으로 이미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스님이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테라와다 불자면 그걸 부정할 방법이 있습니까? 결집은 도장을 박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도 도장과 같듯이, 결집도 도장과 똑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테라와다 불자가 아닐 경우에는 그걸 부정할 수가 있는데, 테라와다 불자일 때는 그걸 부정할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것이 사실이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단지 그것들을 진짜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확인을 해보면 됩니다, 우스갯 같은 소리이지만 부처님이 탄생하고 나서 걸어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다, 부끄럽게도 스님은 처음엔 안 믿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어린아이가 울지도 않고 뭔 얘기를 할까. 그런데 참, 스님은 다행이게도 테라와다 스님이 되고 나서 갖가지들의 초청을 받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애가 막 태어났을 때 스님들이 가서 초청을 받아서 축복을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참 많이 다녔는데 가끔 그런 걸 봅니다. 갔는데 애기가 울지 않고 손을 잡으면서 뭔가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몇 번 그렇게 경험을 하고 나서, '야하.. 일반 범부중생도 저런 경우가 허다한데, 내가 지금 상식에 안 맞다 해서 못 믿을 이유가 뭐 있느냐 하는 거라. 그 정도의 바라밀을 쌓고 태어나신 분이면 충분히 가능하겠구나.' 그래서 지금은, 스님은 여러분들은 경전 중에 어떤 것은 참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할지 모르지만 스님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불교를 믿는 방법은 참 갖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에히빳시꼬’(ehipassiko = 와서 보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와서 보고 확인해봐라. 내 것을 다른 것들과 비교해보든지 니가 스스로 그것을 해체해서 분석해보든지 확인해보라는 거라. 틀린 게 있으면 지적해보라는 겁니다.

 

2600년 동안 어느 누구도 그것을 지적한 분이 없습니다. 부처님 진리를 이것은 잘못됐다고 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자신 있기 때문에 와서 보고 확인해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그럴 생각이 없습니까? 한번 확인을 해보십시오. 진리는 글로써 이해하고 그것을 가슴속에 담아두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반드시 본인이 체험해봐야 합니다. 무상하다 했으면, 무상한 성품을 봐야 합니다. 뭐가 무상한 건지. 그냥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고, 내가 늙고 병들고 하니까 무상하다? 그거는 피상적인 것들입니다. 무상하다 할 거 같으면 무상한 걸 갖다가 본인이 스스로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진짜 오온이 무상한 건지, 아니면 뭔가가 끊임없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면서 변하는 것들이 무상하게 ‘보이는’ 건지 본인이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또 하나는, 무상한 성품을 확인할 것 같으면 해탈로 나아가겠죠. 근데 그렇게 못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어떻게, 부처님 가르침을 그래도 끈이라도 붙잡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으로 하고 살 것이냐는 거라. 그래서 두 가지를 보통 이야기합니다. 해탈로 나아가든지, 그렇게 해서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 돼서 남는 게 있어야 된다는 거라. 선한 공덕을 많이 쌓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하라는 거라. 보시를 행하든 계율을 잘 지키든 아니면 바라밀을 행하든, 뭔가 해가지고 아 내가 참 잘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도록은 해야 될 거 아니라.

 

죽음에 이른 사람들을 보러 참 많이 갑니다. 죽고 나서는 스님들이 잘 안 갑니다. 우리같이 49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기 때문에. 죽음 애도기간에만 스님들을 초청해가지고 법문 듣고 하는 건데, 죽기 전에는 스님들을 참 많이 초청합니다. 근데 대부분 가서 죽음에 이른 사람들 손을 잡으면서 ‘후회 안 합니까’, 하고 물어보면 ‘후회 안 합니다’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아, 내가 좀 더 스님들에게 보시라도 많이 했으면’, 아니면 ‘내가 이런 이런 일을 하고 죽었으면’, 후회하는 것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근데 아까 테라와다의 기준점은 뭐라 그랬죠? 지금 현재입니다. 그거 후회한다고 지금 될 일이 아니거든. 그러면 스님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망상 부리지 마라. 당신은 지금 죽음 문턱에 있다. 죽음 앞에 있는데 과거를 회상한다 해서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거는 당신이 지은 업에 넘겨주고 지금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오로지 평온한 마음을 유지해서 죽음에 이르는 거다. 적어도 그리할 거 같으면 죽고 나서 나쁜 데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라. 죽을 때 딱 몇 분 만이라도 딱 몇 초 만이라도 평온하게 의식을 갖고 죽음에 이르면 적어도 나쁜 데는 안 떨어진다고 되어 있거든. 니가 할 일은 그건데 왜 쓸데없는 걸 하느냐는 거라. 설혹 여러분들도 죽음에 이르면 반드시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스님을 초청하지 못하더라도 본인 스스로는 다 잊어버리고 평온하게 내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관찰하면서 고요하게 숨을 멎도록 하는 것. 그래도 불안하죠? 그러면 좀 더 살아있을 동안에 공덕을 많이 쌓으라는 거라. 저울 추가 무거운 것 따라서 내려가게끔 됩니다. 여러분이 성질 많이 부리고 욕심 많이 부리고 했으면, 그게 무거우면 그것 따라서 과보를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선한 공덕을 많이 쌓았으면 그것 따라서 또 내려갈 거라.

 

빨리 경전에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 여러 가지 받는 현상들에 대해서 중과를 이렇게 여러 가지로 나눠놨습니다. 그걸 스님이 좀 더 쉽게 여러분들한테 얘기를 한 것뿐입니다. 자, 그래서 이제는 집중하는 버릇이 좀 됩니까? 딴 생각 안 하게 되죠? 자, 그러면 한번 봅시다. 태국이나 미얀마 또는 스리랑카, 심지어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우리같이 이런 불교를 하는 사람들을 자기들만의 말로써 바꾸어서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 한다, 초기불교 학자다, 초기불교 스님이다, 이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같이 통일돼있습니다. 테라와다 불자다, 테라와다 스님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찌 보면 그게 공통적으로 그렇게 쓰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스님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항상 부릅니다. 테라와다라고. 여러분들한테는 좀 그 소리가 거슬릴지도 모르지만은, 스님이 쓰는 습관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왜 테라와다라고 할까? 거기에 세 가지를 적어놨습니다. ‘아빤냣땅’(Apaññattaṃ nappaññapeyya = 부처님께서 정하지 않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 마라) 하면서 적어놓은 거 있죠? 그거 세 가지, 빨리어 말고 한글로 한번 같이 합송해볼까요? 1) 부처님께서 정하지 않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 마라. 2) 부처님께서 이미 정하신 원칙을 없애지 마라. 3) 부처님께서 일찍이 설하신 계율에 따라 수행하라. 딱 세 가지입니다. 1차 결집 후에 도장 찍듯이 마하깟사빠 존자가 선언하면서 말미에 넣어놨던 게 이 문장입니다.

 

저도 1차 결집 때 없어가지고 [마하깟사빠 존자가] 넣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근데 그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테라와다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변형하지도 말아라. 그리고 네가 살아가는 것은 청정하게 살아가라. 청정행이 무너져 버릴 것 같으면, 출가한 스님들은 나락에 떨어져 버립니다. 여러분들도 청정행에서 벗어나버릴 것 같으면 악행을 짓게 돼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변형하게 되면은, 또 변형하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그 말미에 내 얘기를 넣는다? 그러면은 여러분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앞의 부분은 빼먹고 내 견해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다 똑같은 나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씩 스님이 법문을 하면 나는 이런 의도로서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달리 받아들입니다. 그걸 많이 봅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습니다. ‘야 이놈아, 내가 이렇게 얘기했는데 왜 너는 달리 이해를 하고 있느냐.’ 하는 구절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여기 있는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요만큼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내 얘기를 되도록이면 안 붙여가지고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물론 비유를 들고 할 때는 지금 현재 이런 경험들을 했는데 이것은 부처님 말씀 어디에 해당된다, 하고 할 때는 그런 비유들은 같이 곁들이긴 하겠죠. 그렇지만 실제 전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 테라와다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변경 안 하고, 더하고 덜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테라와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만약에 그 테라가 자신의 와다(vada = 가르침)를 갖다가 주장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불교가 아닙니다. 자신의 견해를 넣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달리 설명한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삼법인인데 사법인을 만들었다, 부처님은 사법인을 말한 적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또는 부처님이 설한 것은 삼법인과 사성제와 팔정도인데 그것들을 뭉뚱그려가지고 서로 연결되도록 분명히 얘기를 해놨는데, 나는 여러분들한테 전할 때 삼법인만 쏙 빼갖고 무상, 고, 무아야. 사성제는 고집멸도야. 아무리 가르쳐줘봐야 여러분들 그거 들어가지고 무슨 의미가 있어요? 실제 생활에서 그게 쓰일 수 있는 거라, 아니면 그게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알고 따라 할 수 있는 거라?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가르치는 스님이나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는 여러분들이 그것이 실천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은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가끔, 스님이 되도록이면 잘 안 나가려고 그럽니다. 있는 처소에서. 근데 이렇게 초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우리 OOO 회장님이 몇 번 선원에 와가지고 자꾸 해주라 해서, 그래 뭐, 한번 가서 얼굴이나 비쳐주지 하고 이제 왔기는 왔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안 왔을 겁니다. 안 갑니다, 스님은 잘. 별 의미들을 못 찾기 때문에. 왜 그러냐면, 가면 “스님, 강연 시간 한 시간입니다. 아니면 한 시간 반입니다.” 그것만 딱 해주라 그럽니다. 다른 거 필요 없다는 거라.

 

테라와다 스님들은 어디를 가든지 맨 먼저 가면은 삼귀의, 오계부터 먼저 줍니다. 삼귀의, 오계부터 먼저 주고 계율에 대해서 숙지를 시키고 나서, 우리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방법들을 설명을 해주고, 그러고 나서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게 이게 순서인데, 시간을 짧게 준다든지 아니면 그거는 필요 없으니까 “스님, 수행 방법만 가르쳐 주십시오.” 테크닉만 가르쳐주라는 거라. 그럼 가서 뭐해, 내가. 내가 가르쳐준 테크닉, 삼장법사님이 가르쳐준 거니까 이게 맞다, 다른 건 틀리다 할 거 아니라.

 

적어도 테라와다 불교를 가질 것 같으면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는 습관들은 더 많이 길러져가지고 다른 틀린 수행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포용할 줄 알고 그것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있어야 되는데 이 방법만이 최고다, 하고 그럽니다. 심념처 수행처에 가면 심념처가 최고라고 그럽니다. 마하시 수행처에 갈 것 같으면 다른 건 다 틀렸다고 그럽니다. 뭐 하러 내가 거길 가서 그 얘기를 하느냐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을 하려면 바로 하십시오. 수행 방법 테크닉만 알아가지고, 배나 아니면 코로 호흡하는 거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거? 그거 아무리 해봐야 옆에서 누가 금방 나를 갖다가 욕하는 소리를 할 것 같으면 금방 반응합니다. “니 뭐라꼬?” 뭐 하러 해, 그걸.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졌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외부적인 자극으로 인해서 드러나집니다.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거는 다른 사람이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근데 외부적인 자극을 가하면 이 사람은 반응을 하게 돼있는 거라. 적어도 평온한 마음이 있어야만이 사띠를 할 수가 있는데, 사띠로 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갖다가 알아차릴 수 있는데, 이미 외부적인 자극이나 여러 가지들에 반응을 하고 있는 상태라. 걸어가면서도 꽃이 있으면 ‘아, 꽃 예쁘네.’ 하면서 왼발 오른발 합니다. 누가 그거 보라 안 했는데도, 자기 눈에는 보이니까 그거 보고 걸어가는 거라. 명상 음악이 들리면 명상음악이 고요하고 평온하니까 마음이 고요하다고 착각을 하면서 수행을 합니다. 좋고 싫어함으로부터 떠나야만이 수행이 되어 나가지는 건데, 거기에 더 끄달려 들어가는 생활들을 하고 있다는 거라.

 

절대 수행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항상 스님이 강조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수행 방법을 먼저 알려고 하지 말아라. 먼저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고 가볍게 하는 법을 먼저 익혀라, 그럽니다. 뭐가 여러분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 될까, 평온하게 하는 방법. 자면 평온해지겠지. 잠자리에 들 때 숨을 들이쉬면서 잠자리에 드는지, 숨을 내쉬면서 잠자리에 드는지 아십니까? 잠자는 것이 가장 평온할 것 같으면 그걸 해보라는 거라. 내가 마지막에 들이쉬면서 잠이 푹 드는지, 또는 깨어났을 때 숨을 내쉬면서 깨어나는지. 참 재밌습니다. 그거 알면. ‘야, 수행이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 수행 방법을 먼저 알아야 되는 게 아니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면 그게 알아차려진다는 거라. 남하고 말을 할 때도 어? 내가 내 견해를 내세우려고 하지 않고 남을 비난하려고 하는 마음 없이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해보니까. 어? 말이 너무 재밌거든. 내가 뭘 말하는지도 알고. 아, 그래서 나는 말할 때 언성을 높여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를 지니고 말을 해야 되겠구나, 알게 됩니다. 평온한 상태에서 사띠를 하면서 말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게 수행이라는 거라.

 

수행 방법을 자꾸 알려고 하지 말고. 먼저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해서 뭔가를 하는 것들, 이걸 자꾸 훈련을 해야 된다는 거라. 말하는 것, 듣는 것, 보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어떠한 상태에서도 평온하게 그걸 할 수 있으면 그거같이 좋은 수행이 없다는 거라. 여러분은 죽어있는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여러분들이 수행이 돼 나가도록 만들어 나가야 됩니다. 그게 테라와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지향점입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는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옛날에 스님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벗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럼 ‘아, 내가 또 잘못했네.’ 잘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부 중생일 때는 무수한 잘못을 저지르게 돼 있습니다. 그럼 퍼뜩 깨닫고, ‘어? 아니지.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한 게 아니지.’ 하면서 다시 또 돌아오게 되는 거라.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 위한 것이지. 가르침을 기억하고 저장해두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그대로 실천해나가게 될 때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지 않게끔 됩니다.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 첫 번째, ‘모든 것은 스스로 확인하라.’ 이렇게 적어놨습니다. 이거는 <깔라마 경>을 스님이 좀 쉽게 설명을 해놓은 겁니다. <깔라마 경> 여러분들 아시죠? 모르면 읽어보십시오. 그런데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얘기를 한 이유가 뭘까? 전통적인 거라고 해서 따라 하지 말고. 너 스승이 가르친다 해가지고 그게 진리라고 하지 마라. 그 얘기를 하고 싶었을까? 부처님이 그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이 <깔라마 경>을 설했을까? 그게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은 자꾸 중요한 걸 빼먹어 버립니다. 부처님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4페이지 중간 밑 부분에 보면, ‘이와 같이 부처님은 선, 불선은 스스로 아는 것이어야 하고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여러분 착한 일 하는 건 여러분 스스로 압니까? 나쁜 짓은 나쁜 짓이라는 걸 압니까? 그럼 모를 것 같으면 공부해야 되는 거라. 스스로 확인하라는 거라. ‘어, 이거? 내가 잘못했구나’ 할 것 같으면 그걸 안 하도록 해야 되는 거고 착한 걸 했으면 ‘내가 이거 착한 일 했네. 잘했네.’ 하고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더 하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게 스님이 가르친 것이든 전통에서 말하는 것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선과 불선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걸 따라서 실천을 하는 것들, 그걸 부처님이 얘기를 한 겁니다. 그래야만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확신이 생깁니다. 확신이 들지 않는 거는! 그것은 그냥 맹목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하면 뭐 합니까. 부처님 고마운 줄을 모르는데. 담마의 고마운 줄을 모르고 그것을 전해주는 상가의 고마움을 모르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거라.

 

여러분이 부처님 제자입니까? 확신이 들도록 하라는 거라. 부처님 제자이면은 그것을 따라 해야 되는 거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아가는 방향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야 되는 거고, 내일보다 모레가 더 나아져야 되는 것이지, 똑같이 돼버리고 못해진다 할 거 같으면 확신이 안 든다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은, 적어도 여러분들이 -여기서는 테라와다라고 안 하고 초기불교라고 하면- 초기불자라고 할 거 같으면 스스로 확인하는 것들이 기준점이 되어야 합니다. ‘아, 내가 오늘 잘 살았는가?’ 어제보다도 '어, 내가 이런 거는 참 잘했구나.' 뭔가 확인이 가능해야 될 거 아니냐는 거라.

 

진짜 초기불자답게 살아가려면 스스로 자꾸 돌아보고 확인하십시오. 그래서 선한 것들을 자꾸 더 하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불선한 건지 알면서도 자꾸 그것을 행해가서는 안 됩니다. 기준점 첫 번째를 얘기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구절이 꾸살라(Kusala = 선함, 능숙함), 뿐냐(Puñña = 공덕), 빠빠(Pāpa = 악행), 아꾸살라(Akusala = 불선함, 능숙하지 못함) 이런 용어들이 나옵니다. 쉽게 얘기하면, 경에서는 꾸살라, 아꾸살라가 많이 나오죠. 근데 이 구절만 가지고 보면은 꾸살라, 아꾸살라보다는 뿐냐하고 빠빠의 성격이 강합니다. 여러분들이 뭔가 일을 능숙하게 처리해나갈 때는 꾸살라가 됩니다. 여러분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잡생각 없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다, 그건 꾸살라가 됩니다.

 

근데 그게 여러분들 업이 됩니까? 업이 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면 그것은 뿐냐가 돼버립니다. 여러분들 선업이 됩니다. 옷을 입을 때 옷을 입는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것은 분명하게 선업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선업의 결과는 여러분들에게 나타납니다. 남에게 뭔가 선물을 줄 때, ‘네가 이 선물로 인해 행복해지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주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선업 공덕이 됩니다. 주기 아까워갖고 “니 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사띠(Sati = 마음챙김)가 있게 될 때, 모든 행위에 사띠가 있게 될 때는 선업 공덕이 됩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은 선업 공덕을 많이 쌓았을 때, 단계들을 밟아 나갈 때 그것을 차올라가는 힘이 생깁니다.

 

출가한 스님을 한번 봅시다. 어떤 선업 공덕을 쌓았길래 출가를 하게 됐을까? 여러분도 출가하려는 사람들 많죠? 많이 있을 겁니다. 근데 왜 출가 못 하고 있을까? 뭔가 출가를 하기 위한 조건 중에서 선업 공덕 뭔가가 빠져 있다는 거라. 거짓말같이 보이죠? 수행을 해보면 그걸 분명하게 압니다. 어, 내가 여기서 수행이 참 잘 되는데, 삼매에 들지 못한다? 뭔가 빠져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10가지 바라밀 중에 하나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선업이든, 뭔가가 빠져 있다는 거라. 안 들어가져. 또는 1선정에서 2선정으로 넘어가는데, 그거를 버려야 2선정으로 넘어갈 건데 버리지를 못하는 거라. 뭔가가 빠져 있기 때문에.

 

해탈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선업 공덕이 축적되지 않으면 단계 단계를 밟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단계를 밟지 않고 해탈에 넘어갈 수 있습니까. 아까 OOO 회장님이 16단계 지혜의 단계 얘기를 하데. 그거 안 밟고 넘어갈 방법이 있습니까? 아니면 선정을 자유자재로 할 때 1선정 필요 없으니까 빼버리고 2선정, 3선정 바로 갈 수 있습니까? 수다원이 안 되고 불환과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럴 방법이 없습니다. 뭐로 가지고 넘어갈 거라? 평소에 여러분들이 선업을 쌓지 않으면, 중요할 때 걸림돌이 딱 되어 버립니다. 그걸 스님은 많이 경험을 했고 많이 봐왔습니다.

 

참, 저 스님은 수행하면 참 잘할 스님인데, 뭔가 딱 걸려 있거든. 며칠 동안 곰곰이 그 스님을 관찰해봅니다. 한번은 그런 적이 있습니다. 본인은 그것이 잘못된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때는 잘못된 거라. 누가, 여성분이 뭔가 물건을 줄 때 뭐 좀 그냥 툭 받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근데 이 스님에게는 중요한 게 딱 하나 빠져 있습니다. 계를 존중하려는 마음이 빠져 있는 거라.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사소한 허물도 짓지 말라고 했는데 이미 나는 그걸 짓는지 안 짓는지도 모르고 저지르고 있는 거라. 올해도 스님은 겨울 되면 태국으로 또 넘어갑니다. 이 코로나 시국에. 왜 갈까? 내가 거기 가서 무슨 법문 열심히 하고 수행지도 하기 위해? 그것도 물론 하겠죠. 근데 중요한 게 딱 하나 있습니다.

 

참회하러 가는 겁니다. 한국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사소한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너무 가슴에 걸려. 그럼 해마다 나는 여름 우안거, 왓사(Vassa = 안거)가 끝나고 나면 가야 되는 거라. 안 그러면 찝찝해. 그 20인 스님 밑에 있는 데 가가지고, 지금 스님이 테라와다 법랍으로 벌써 34년이 됐습니다. 근데 1년 차 밑에 가서 삼배 드리면서 “스님, 내가 사소한 허물을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은 것들이 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참회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합니다. 그럼 그 스님들도 ”그래, 잘못한 거 알았으면 다음부터는 잘못 저지르지 마십시오. 나도 잘못한 거 있으면 당신도 나를 용서해주시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너무 그게 그립거든.

 

여러분도 한번 돌아보십시오. 사소한 거 같지만은 허물을 저지르는 것이 없는가. 그것들이 여러분들을 다음 단계로 넘겨주는 데 걸림돌이 틀림없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반드시 제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가끔 수행하러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면 얼굴에 쓰여 있습니다. 저 사람은 좀 자기 견해가 강하구나, 저 사람은 욕심을 많이 부리는구나, 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을 먼저 하려고 하지 말고 그거 먼저 좀 해보십시오. 한 달만이라도 그걸 해보고 잘되면 오십시오." 거의 백 명 중에 한 명 정도 돌아올까? 나머지는 안 돌아옵니다. 수행 가르쳐주라고 갔더만 엉뚱한 소리만 자꾸 한다고. 그게 걸림돌이 되어 있는 거를 본인은 생각을 못 하고 본인은 그걸 바꾸려고 하지를 않는 거라. 여러분은 그런 누를 자꾸 범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실천 수행하라. 칸띠(Khanti = 인내, 침착함)하고 티띠까(Ṭhitika = 인내)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보통 칸띠를 인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칸띠 원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상에 대해서 평온하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칸띠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대상이든, 그걸 무조건 속은 부글부글하면서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해서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 ‘어? 저 사람이 나를 욕하고 있네, 저 사람이 나를 칭찬하고 있네.’ 그걸 알아차리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기분 좋아지고 싫어지고 하는 마음 없이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 그게 칸띠라는 거라.

 

칸띠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래서 7페이지 중간 하단부 보면 그렇게 적어놨습니다. 이것은 '수행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불교의 답입니다’라고 적어놨습니다. 어떤 것에도 물결치지 않는 침착한 마음과 괴로운 것에 대해서 인내를 만드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그게 실천 수행하는 겁니다. 실천 수행을 하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에 대해서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잘 대치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 8페이지 보십시오. 테라와다, 그냥 초기불교라 하겠습니다. 초기불자의 기준점은 ‘출가자나 수행자처럼 살아라’ 하는 게 네 번째 기준점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스님이 출가하고 나서 스승님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뭐냐 하면, "아라한 처럼 살아라" 입니다. "아라한처럼 살아라. 니는 아직 아라한이 아니지마는 아라한처럼 살아라." 그게 나중에 너무 너무 고마웠어요, 그런 말이. 적어도 스승이면 그런 말을 해줘야 되는 거라. 아라한처럼 위엄있게 해야 되고. 그래서 어떨 때는 보면 가사를 입고 가는데 어떨 때는 이걸 안 잡고 이렇게 손을 펄럭펄럭합니다. 그러면 뒤에서 스승님이 나를 부릅니다. 부르면서 "아라한처럼 걸어라" 그럽니다. 그러면 퍼뜩 정신이 들어서 다시 옷매무새를 잡고 요걸 딱 잡습니다. 흐트러짐이 없도록. 스스로 조심을 하게 됩니다.

 

왜 아라한처럼 살아야 될까? 만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걸 성취하면 그것에 대해 만족함을 갖습니다. 근데 그 만족감으로 인해서 윤회를 탈출할 수 있는 거면 좋은데, 그게 아니거든. "나, 계율 잘 지키고 있다." 남한테 으시댑니다. 그래서 남, 계율 안 지키는 사람을 막 뭐라 합니다. 내가 계를 잘 지키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윤회로부터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수행에서 니밋따도 보고 어 삼매도 들고 있는데, 그게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까? 그럼 왜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계속 살려고 그럽니까. 윤회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했으면서. 출가자처럼 살아야 됩니다. 적어도 수행자들은 그렇게 행동을 안 한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수행자일 것 같으면 그렇게 안 산다는 거라.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적어도 이 불교를 알게 되었으면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안 지긋지긋합니까? 윤회하는 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거, 들이쉬었으면 또 내쉬어야 되는데? 이거 안 힘듭니까? 수만 번을 수없이 계속 그렇게 반복을 했는데, 반복하는 중간에 여러분들이 어디로 갈 줄 알았어? 왜 그렇게 살려고 하느냐는 거라. 아직은 아라한이 되지 않았으면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인해 행복해하면 안 됩니다. 너무 무겁게만 얘기해가지고 미안합니다.

 

 

9페이지. 테라와다 불교를 배우는 목적. 읽어보십시오. 시간이 이미 오버가 돼가지고. '붓다를 알면 법을 알고 법을 알면 괴로움으로부터 풀려난다' 하면서 얘기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게 뭐냐면, 부처님도 인간으로서 인간을 뛰어넘은 자가 됐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비밀스럽게 감쳐둔 것이 없고 다 펼쳐 놓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여러분은 따라 하면은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를 접하는 목적이 바로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돼야 된다는 거라. 여러분의 목적지는 윤회로부터 벗어나서 해탈하는 겁니다. 목적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테라와다 불제자의 할 일. 초기불자들은 이런 일은 반드시 해야 된다는 거라. 보시, 지계, 수행 또는 쭉 적어놓은 거는,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을 쭉 적어놨습니다. 그냥 사마타, 위빳사나 이렇게 구분해가지고 그거 그냥 형식적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씩 따라가면 됩니다.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선정에 도달할 수도 없고,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행해봐야 헛일이라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을 유념하고 항상 ‘아, 내가 부처님 제자답게 살고 있는가' 하는 걸 갖다가 돌아보고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거를 자꾸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초기불자가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제3회 21세기 불교포럼, 삼장법사 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

(필사자: 초기불교/테라와다불교 공부방 오픈채팅, 필사 봉사자 모임)

 

[출처] 테라와다 불자의 기준점 (아짠 진용 빤냐와로)|작성자 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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