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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마나(adhimāna, 증상만)와 아띠마나(atimāna, 고만) (20180901)

사깜마
2024-09-26
조회수 71


* 아디마나(adhimāna, 증상만)와 아띠마나(atimāna, 고만) (20180901)

 

오늘은 아띠마나(atimāna, 高慢)라고 하는 마나(māna)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혹시 우리 선원 앞에 감나무 있는 것 봤어요? 감나무에 벌레 있는 거 봤어요? 벌레가 좀 많이 생겨가지고 감잎뿐 아니라 감이 영글기가 좀 힘들게 됐습니다. 저번 주에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거 빨리 약을 칠하지 않으면 감 하나도 못 따먹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감 안 따먹으면 되지 뭐, 그렇다고 벌레까지 죽일 게 뭐가 있어 그러고 말았는데. 그 사람은 그걸 이해를 못 하는 거라. 감나무에 감이 열렸으면 감을 따먹어야지 벌레 때문에 감을 못 따먹게 놔둔다고 하면 그것도 좀 이상하다고. 그것뿐 아니라 옆에 돌배도 비슷한 상황인 거 같애요. 그래서 벌레 피해 안 보려면 그쪽 가까이에는 안 가는 것이 좋을 거라.

 

보통 그런 마음들을 아디마나(adhimāna, 증상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자 측면에서 얘기를 하면, 보통 처음에 수행할 때 계율을 지키려고 그럽니다. 오늘 같은 날은 팔계지키죠! 팔계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여러분들 같은 경우는 매주 토요일은 팔계지키려고 열심히 하다 보면 선원에 오던 안 오던 어쨌든 자연스럽게 토요일은 팔계는 지키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얻어지는 효과가 뭐가 있느냐면 그렇게 해도 살아가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고 오히려 시간적인 여유도 좀 많이 생기고, 또 그러면서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적어지기 때문에 마음도 좀 깨끗해지고 맑아지는 느낌도 들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다가 수행을 하게 되면 마음도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는 그런 느낌들이 듭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거기서 ‘음! 내가 참 많이 발전했어’ 그러면서 거기에 안주를 할려고 그럽니다. 

 

그걸 불교용어로 아디마나(adhimāna)라고 합니다. 아띠(ati)가 아니라 아디(adhi)입니다. 에이 디 에이치 아디(adhi) 마(mā)는 장음이고 마나(māna) 붙여서 아디마나(adhimāna) 그렇게 됩니다. 보통 증상심(增上心)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율장에서 말하는 증상심하고 수행에서 말하는, 또 증상심 또 경전에서 말하는 증상심은 조금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증상심은 더더구나 많이 차이가 납니다. 

수행자의 측면에서는 그냥 거기에 안주해가지고 편안하고 고요한 것만 찾아가지고 안주해있는 것들을 아디마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경전 같은 경우에는 그것보다는 자기가 보다 높다고 내세우게 되는 것,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 자꾸 깍아내리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런 것들을 법에서는 아디마나라고 그럽니다.

 

율장 같은 경우에는 내가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으면서도 "나 깨달았어"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게 되는 것 그런 것들을 증상만(增上慢)이라고 그럽니다.

대승불교 같은 경우에는 특히 법화경이나 이런데 많이 등장을 하는데, 만약에 법화경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할 거 같으면 저것은 증상만자다 하고 선언을 하게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가 수지하고 있는 경이나 이런 것들이 수승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일체의 조사나 그것들에 대해서 연구하고 하는 것들을 불허하는 입장을 취하는 그런 이들에게 증상만에 속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수행 측면에서도 조사선이 최고 우월하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은 전부 증상만(增上慢)에 속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찌보면은 수행자의 측면하고 경전이나 율장에서 말하는 증상만은 조금씩 틀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구분 없이 조금 조심해야 되는 것은 수행에서 편안하고 고요한 것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스님이 병원에 가끔씩 갈 일이 있는데 병원 의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하다 보면 그런 증상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고 얘기를 듣게 됩니다. 어떤거냐면 병은 요만큼 밖에 없는데 와가지고 이마만큼 병이 있는 것처럼 얘기한다는 겁니다. 의사 입장에서도 아무리 봐도 요만큼 커진 것은 아닌데, 아무리 그게 아니고 요만큼밖에 없다 하고 얘기해도 그걸 안 믿는다는 거라. 아파도 지나치게 아픈 것처럼 실제 느끼고 또 그렇게 얘기를 하고, 의사 입장에서는 그럴 때는 조금 난처하다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과대포장 된다는 거죠. 그런 것들도 일상생활에서 증상만에 속하게 됩니다.

 

또 다르게 얘기하면 여러분이 일상생활하면서 남이 나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그럼 그 싫은 소리는 그거 딱 한마디인데도 그게 십년이 가는 경우도 있고, 그것도 어찌 보면은 과대포장 돼버렸다는 겁니다. 실제 그 한소리 한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오래 가야 될 이유가 없는데 평균적으로 봤을 때도. 그런데도 십년 동안 원수로 산다든지 아니면 ‘다시는 저 사람 안 봐’ 이러든지 이렇게 발전돼버리는 거라. 그게 일상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감나무 예를 보더라도 벌레가 나뭇잎 다 갉아먹고 나서 설혹 감까지 떨어지기도 하고 감을 못 먹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건 앞으로 모르는 거라. 그렇게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미리 그걸 점쳐가지고 내가 감 하나 더 따먹기 위해가지고 벌레를 다 죽이게 되는 상황이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증상만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증상만이라고 하는 아디마나(adhimāna)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질문 : 감(感)이 많은 것을 얘기하는 겁니까?) 

그렇죠.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감(感)이 많은 것들.

 

그런데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띠마나(atimāna, 高慢) 입니다.

아디가 아니고. 에이 티 아이 아띠(ati), 아띠 마나입니다. 마나는 똑같은데 아띠마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최고다 하는 것, 아만심이 높아진 상태들을 얘기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을 자기보다도 높게 치는 것들은 보질 못하는 거라. 그렇게 높게 칠려고 할 것 같으면 아니라고 부정한다든지 하는 거라. 특히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많이 겪은 게 뭐냐하면 운전기사가 우리 차가 이리 가면은 우리 차 앞에 다른 차가 가는 꼴을 못 보는 거라. 특히 소형차들이나 오토바이 같은 그런 것들만 보면 그냥 천천히 뒤에 따라가면 되는데 꼭 질러서 가. 그래서 “왜 그래? 천천히 가지” 이렇게 얘기하면 못사는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앞에 가는 게 싫다는 거라. 내가 질러가야 되지 그거 뒤따라서 못 간다는 거라. 

그런 게 어찌보면 아띠마나(atimāna)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훨씬 더 높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견해가 달라도 그런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견해와 다를 경우에는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고 알 것 같으면 '뭐 그런 견해도 있을 수가 있지' 하면 되는데, 무조건 자기가 알고 있는 경율론에 맞춰가지고 '네 것은 틀렸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인이 깨달음에 이르고 나면은 실제로는 그런 생각 자체가 없어져버립니다. 「나」라고 하는 마나라고 하는 것이 아예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니 견해가 맞니, 내 견해가 맞니, 어쩌니 저쩌니' 하는 얘기들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도 아띠마나 라고 하는 것에 속합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얘기한 증상만(增上慢)이라고 하는 아디마나하고, 고만(高慢)이라고 하는 아띠마나는 차이가 좀 많이 나는 것입니다.

 

수행에서는 어떤 게 많이 일어나질까?

어떤 사람들은 편안하고 고요한 것만 찾아가지고 그냥 거기에 안주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수행하다 보니까 '아! 진짜 내가 하는 게 진짜 이게 맞다' 

그래서 나는 '다른 건 다 틀렸다', 나는 '이게 맞니' '이 수행방법만이 최고다' 하고 고집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거고 조금조금 틀릴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앞에 거(아디마나)는 크게 문제가 안 되는데 뒤에 거 아띠마나는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그런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해서 이 아따마나(atimāna, 高慢)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런 것이 있으면 빨리 버려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한번 판단을 해보십시오.

 

첫 번째가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 있는가?

내가 스님인데 하는 인정, 또는 내가 수행자인데 하는 인정, 아니면 가정생활 하고 있으면 내가 엄마인데 감히 니가... 

수행에서 수다원에 이르렀다 해도 인증하는 인증서가 있습니까? 아라한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인증해주는 인증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건 본인이 합니다. 본인이 스스로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구나, 내가 불환과에 이르렀구나, 내가 아라한에 이르렀구나 하는 것을 본인이 알게 되는 거고, 그걸 알면 알수록 마나는 없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내세울려고 하는 것은 없어져버립니다. 그게 바른 방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수행을 하면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자꾸 그걸 내세울려고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걸 자꾸 내세울려고 하고.

왜 그렇게 될까? 마음에 탐진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정해줄려고 인정받을려고 하는 것도 탐심인 것이고, 그 인증 누가 안 해준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에 대해서도 화를 일으키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하고 같이 수행 안 하고 다른 방법으로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용인해줘야 돼 하는 마음이 들고. 자신의 마음속에 뭔가를 인정받고 싶어한다고 판단이 들면 항상 마음속에는 탐진치가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어! 내 맘에 뭐가 일어났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자꾸 볼려고 해야됩니다. 견해를 집착하고 있다든지,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든지, 아니면 그것으로 인해서 분노가 일어났다든지, 아니면 게을러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나는 이 정도 했으면 됐어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그래서 항상 어떤 마음들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자꾸 볼려고 할 것 같으면 인정받을려고 하는 마음도 참 쓸데없는 마음이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본인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인정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릴 때는 어린아이로서 대접을 받았습니다. 크고 나면 어른으로 대접받습니다. 더 크고 나면 인제는 노인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어떤 것이 여러분들 거라고 그것들을 인정해 줄 거라? 어린아이로 인정해줄까요? 아니면 성인으로 인정해줄까요? 뭐로 인정해줄까요?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인정해서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 나 엄마야!’ 왜 인정을 받을려고 하느냐는 거라. 엄마로서의 할 일들이 있는 것이지 그리고 그때 해야 될 일들이 있는 것뿐인 것이지 그것들로써 어머니로서 인정해줘야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인정을 받고 싶어 하면 항상 탐진치가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물론 그런 것은 있습니다. 태국에서 그런 것들을 많이 느꼈는데 어떤 스님은 지나치게 단 거 초코렛 같은 거를 되게 좋아합니다. 그걸 남이 가지고 있으면 “야! 그거 좀 줘” 그러거든. 어떨 때 봤을 때는 스님 신참 일 때 생각이 도저히 다른 사람들이 '저 스님이 깨달았다'고 하는데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남의 거 욕심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 그런데 과거생에 지은 습성들이 남아있어가지고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습성들이 그대로 드러나집니다. 식사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양을 많이 먹는다든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먹는 것보다도 뒤에 단 거 많은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섭취한다든지. 

 

그래서 어찌 보면은 여러분이 그 상황이 되지 않으면은 그 사람의 입장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게 과거습성이 남아있어 그러는 건지, 아니면 탐진치가 있어 그러는 건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처음에는 그걸 보고 내 입장에서 판단하는 거라. ‘어! 저렇게 욕심부리는 거 보면은 아직 수다원에 못 이른 거야.’ 내가 스스로 판단한다는 거라. 사실은 그게 아닌데. 

물론 그런 부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본인 스스로 끊임없이 탐진치가 일어나는 인정을 받을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걸 자꾸 제거할려고 했을 때 아띠마나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엷어질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가 존재욕구에서 파생하는 것들인데 다른 사람들을 공격할려고 하는 것들.

지금은 비가 그쳤는데 만약에 여기 비가 엄청 많이 온다고 생각했을 때 비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을 가질까? ‘아! 좀 안 왔으면’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건 진짜 무생물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여기 있는지 그것도 전혀 모르는 무생물인데도 그걸 공격할려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왜? 내가 조금 더 안락하고 내가 조금 더 편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나를 방해하는 것들은 적으로 돌려버린다는 거라. 자연재해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본인이 물론 방어를 해야 되겠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연재해가 여러분들의 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을 비난하고 하는 대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을 했든 잘못을 하지 않았든 오해를 했든 안 했든 간에 여러분들을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부처님도 신구의에 의해서 아무 잘못한 것이 없었는데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여러분들은 오직 하겠어요?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을 자꾸 적으로 돌리느냐는 거라. 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적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나를 방어할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적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딱 버려버리고 나면은 나를 비방하려는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어! 저 사람이 왜 저런 얘기를 했을까?’ 오히려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어서 그렇구나 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 될 수가 있는데 자기를 방어할려고 하다 보면 그 소리가 안 들립니다.

 

어찌 보면은 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들은 내가 살고 싶어하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공포감들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살아가고 싶은 존재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버리면 되는데 그러한 존재욕구들이나 공포감들은 반드시 욕심과 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끊임없이 욕심들이 일어나게 되고 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거라. 

좀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설혹 나를 비방하는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는 나에게 해로움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스스로를 지키고 하는 욕심을 부리는 것, 자아를 자꾸 형성할려고 하는 것들, 그것으로 인해서 성냄을 자꾸 일으키는 것들, 그런 것들은 자꾸 멀리하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두려움과 무서움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과 무서워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행복이나 건강이나 이런 것들이 깨지는 것이 두렵고 무서워한다는 거라. 좀 더 늙어 보이면 어때서? 본인은 그것을 지킬려고 굉장히 아둑바둑 합니다. 두렵기 때문에!

 

진짜 두려워해야 되는 것은 악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들로 인해서 벌어질 업의 결과들을 두려워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늙어가고 변해가고 또 죽음을 맞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될 이유가 없다는 거라. 그렇게 막고 변하지 않을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변해가고 늙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지금 안 아프면 좋죠. 지금 다른 사람보다 젊어보이면 좋죠. 그런다고 그게 평생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건강할 수 있을 때 건강을 유지할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좀 더 젊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는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되면 다른 것들을 놓쳐버린다는 거라. 그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불선심은 챙기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스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숲속에 들어갈 때 스님이 여기 포행을 요 밑으로 자주 갑니다. 갈 때 나무막대기 하나 부러진 거 있으면 주워가지고 요렇게 톡톡톡톡 치면서 갔어. 난 단순하게 생각을 했는데. 혹시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면 빨리 피하라는 의미로 톡톡 친다고 마음을 먹고 그렇게 했는데, 탁 마음 한편을 돌아보니까 ‘어! 내가 뱀에게 물리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마음이 살짝 생기는 게 보이는 거라. 내가 이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숲에 가는 것이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마음들. 아직도 두려움과 그런 무서움들이 남아있다는 거라. 미세하게라도 남아있다는 것이 보이는 순간 ‘아! 이건 아니다’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착 다가와지는 거라. 

 

여러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수단도 강구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먹고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그냥 죽여도 된다든지 아니면 다른 생명이 해야 될 일들을 갖다가 여러분들이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뒤부터는 조그만 나뭇가지 하나도 안 가지고 다닙니다.

여기는 보면 노루, 노루가 아니고 그거 뭐지? 그것도 막 쫓아다니고 여기 선원 안에 쫓아 들어오기도 하고 그럽니다. 고라니, 고라니입니다. 그거 항상 두 마리가 이렇게 다니거든. 어떨 때는 그냥 가만히 놔둡니다. 그러면 그 고라니들이 뛰어다니다가도 그냥 내가 편안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뛰는 것을 멈춰요. 그냥 보고 슬슬슬 걸어다니다가 슬 나가요.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간혹 내가 다니면서 쟤들이 불편하게 하는 행동들을 내 스스로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을 반성들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아띠마나 입니다. 내가 그 동물들보다 뛰어난 것이 뭐가 있다고, 평등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냐는 거라. 그래서 지팡이 하나도 가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아띠마나가 있는지 없는지를 구분할 수 있는 좋은 방법들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입으로만 말로만 개념적으로만 이해할려고 하지 말고 그러한 것들을 자꾸 줄여나가고 했을 때 내편 니편이라고 하는 것, 너와 나라고 하는 것들의 경계는 자꾸 허물어지게 됩니다. 

간혹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나는 내 거 챙기면서 자애수행만 열심히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할 거 같으면 자애수행만 하라 그러겠죠. 자애수행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수행해가지고 평온한 마음 고요한 마음, 또 탐진치가 일어났으면 탐진치가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버리면 좋은데 그게 끝이 아니라는 뜻이라. 더 알아야 될 것들 더 없애야 될 것들은 더 많이 남아있다는 거라. 그중에 하나가 이 아띠마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게 볼려고 하고 내세우려고 하는 버릇들은 되도록이면 빨리 없애는 것이 수행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있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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