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것은 느낌에 의해서 살아가는 거라는 것, 모든 것은 느낌으로 우리는 이해를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이와 살아있는 이를 비교해본 부분이 있고, 그래서 느낌·감각으로 인해서 보통 우리는 살아있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이 느낌을 느낌으로써만 알아차릴 것 같으면 참 좋은데 대부분 우리는 그리 안 하죠. 느낌으로 인해서 취하고 내버리고 이렇게들 한다는 거라. 그렇게 하다 보니까 욕심내고 화내고 이런 행동 패턴으로 바뀌어진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 느낌의 중요함이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수행법을 가르칠 때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하라 하는 것은 그런 '맨느낌', 처음으로 받아지는 느낌들을 관찰대상으로 해서 거기서 더 이상 발전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할 때 어떻습니까? 처음에 배를 관찰하고 '일어남' '사라짐' 이렇게 하면, 거기서 처음부터 느낌을 바로 아는 건 아니죠? 딱딱한 느낌이라든지 움직임이라든지 아니면 뜨거운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아는 건 아닐 거라.
처음 수행할 때 어떻게 합니까? 보통 모양이나 형태들을 보죠? 그렇죠!
안 그러면 경행할 때도 그렇게 발 모양을 보지마라 그래도 맨 처음 보이는 건 발 모양부터 보입니다. 발을 내려놓을 때는 발이 이렇게 내려가는 것이 보이거든요. 모양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꿈치가 먼저 닿는지 뒷꿈치가 먼저 닿는지 내가 그 모양이나 형태가 먼저 눈에 띄게 돼있습니다.
그건 수행할 때 어쩔 수 없습니다. 앉아서 좌선할 때도 배의 모양이 먼저 보이게 되어있고, 경행할 때도 발의 모양이나 형태들이 먼저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양이나 형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걸 '개념'이라 그럽니다. 빨리어로는 '빤냣띠(paññatti)'라고 얘기합니다.
개념에 휩싸여버릴 것 같으면 수행에 진척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개념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거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과라는 걸 탁 떠올린다. 그럼 사과라는 모양이 있단 말이라. 모양이나 형태. 그러면 내가 떠올린 개념하고 다른 사람이 떠올린 개념하고 또 다를 거란 말이라. 그렇지만 내가 떠올린 개념은 그 개념을 내가 스스로 바꾸어주기 전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 사과의 형태나 모양은 내가 떠올리면 계속 똑같이 그렇게 됩니다.
형태나 모양은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개념을 일단은 놓아버려야 만이 '실재'를 보게 됩니다. '실재'를 보통 빨리어로 '빠라맛타(paramatt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빤냣띠를 놓아버리고 빠라맛타를 알려고 노력해라 하는 거는, 모양이나 형태 개념들을 놓아버리고 실제 일어나는 것들, 뭐 어떤 것이 실제 일어납니까? 뜨거운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딱딱한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실재하는 것들입니다.
왜? 왜 실재하는 것이라고 그럽니까? 그 느낌들은 변하니까!
모든 사물 모든 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실재한다고 할 거 같으면 변해가야 됩니다. 사물의 이치로 봤을 때는!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팽창하는 느낌이나 움직이는 느낌들을 꿰뚫어 보듯이 집중해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좌선할 때는 딱딱하고 팽창하고 움직이고 뜨겁고 하는 그런 느낌들을 알고, 경행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가볍고 무겁고 하는 움직임의 요소들이라는 그런 느낌들을 알도록 먼저 하라 라고 그렇게 합니다.
처음 수행할 때는 그게 잘 안됩니다.
걸어갈 때는 다리가 보일 거고, 앉아서 수행할 때는 배가 보일 거고, 이렇게 빤냣띠가 분명합니다. 그 딱딱한 느낌이나 이런 느낌 빠라맛타는 분명하지 않는데 수행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조금씩 더 수행이 무르익어가고 지혜가 조금씩 더 성숙해지면 빠라맛타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때는 형태나 모양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고 단지 단단함, 수축함, 움직임 이런 것들의 느낌들만 증가하는 것이 현저하게 보입니다.
실재하는 것이 현저할 때는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숨어버립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정확하게 할 거 같으면 사마타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숨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사마타 수행은 변하지 않는 대상, 하나의 대상에 몰두하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개념과 마찬가집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변하는 대상, 실재하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사마타 수행은 줄어들게 되고, 위빳사나 수행이 안 되니까 하나의 대상에 자꾸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이 돼버리는 형태들을 띠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행하다 보면 아! 내가 지금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구나,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눈치를 채야된다는 겁니다.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인제는 어느 정도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구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돼야 만이 빨리 내가 전환을,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모양이나 형태가 보인다면 아! 이건 아니지 하면서 실재를 자꾸 볼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되서 담마가 그때서야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느낌이 그마만큼 소중한 것인데, 느낌은 어떻습니까?
즐거울 때 괴로운 느낌이 같이 있습니까? 괴로울 때 즐거운 느낌이 있습니까? 없죠! 각각이죠! 따로따로입니다. 절대 이와 같은 느낌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즐거운 느낌이 있는데 누가 자극을 할 경우에 내가 괴로운 느낌으로 변화될 수는 있습니다. 괴로운 느낌도 즐거운 느낌으로 변화될 수가 있고.
그래서 부처님이 분명하게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는 괴로운 느낌이나 무덤덤한 느낌은 경험할 수 없다 하고 악기웨사나라고 하는 분한테 부처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다른 경우도 꼭 마찬가지고! 그러면 느낌이라는 것은 각각 독립적이라는 뜻입니다. 각각 독립적! 그래서 동시에 내가 그걸 인식하고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죠!
그 느낌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어떻게 일어납니까?
눈을 통해서 밖에 있는 대상이 내 눈을 통해서 들어와서 그것을 인식하고, 인식함으로 인해서 나에게 느낌들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눈과 밖의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안식-눈이니까 눈이라는 인식, 이 세 개가 합해졌을 때 느낌이란 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느낌이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아! 저거 좋은 거', 아니면 '아! 저거 싫은 거'하고 집착하게 되죠. 그 집착으로 인해서 말이나 행동들 이런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느낌을 관찰하라는 의미는 뭐냐면 집착하기 이전의 느낌만을 관찰할 거 같으면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이런 느낌으로만 알게 되는 것이지 '저걸 가져야 된다', 아니면 '버려야 된다' 하는 이런 상태까지는 가지 않게 된다 하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힘드는 게 뭐 때문에 그런 겁니까? 갖고 싶은 거 못 가지고, 내버리고 싶은 거 못 내버리고, 이러니까 힘든 거 아닙니까?
느낌 자체로 봤을 때는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집착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즐겁구나, 괴롭구나 하는 느낌만 있을 뿐인 것이지, 그래서 그것이 수행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집착을 하다보니까 어떻게 돼요? 못 가지니까 내가 망상을 피우고 가질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마음이 점점 더 오염돼서 '나' '나라는 존재' 이런 것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왜 부처님이 이렇게 느낌을 알아차리라고 하는가 하면,
어쨌든 우리는 인식한다는 거는 이런 접촉으로 인해서 인식하는 겁니다. 접촉이 일어나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무리 저기 대상이 있고 내가 그걸 인식을 할려고 한다, 그런데 눈 감아 버리면 인식합니까? 못하죠! 아무리 내가 귀가 있고 저 밖에 있는 소리를 인식할려고 하더라도 저 멀리 소리가 있는 거는 내가 인식 못합니다. 소리가 없는 겁니다. 그 파동이 나한테 못 미치니까.
어쨌든 인식할려면 이런 세 가지가 합해져야 만이, 접촉해야 만이 인식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접촉에 의해서 첫 번째 일어나는 반응이 뭡니까? 느낌입니다!
그 느낌은 뭐로 느낍니까? 몸이 느낍니까? 마음이 느끼는 거죠!
마음이 반응하는 첫 번째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정복하고 싶은 사람은 맨 첫 번째 단추인 접촉을 관찰하라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알아차리지 않으면 이 느낌은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집착하게 되고, 갈망하게 되고, 그래서 그 갈망 갈애의 원인이 돼서 그것이 강해지면 어떻게 돼? 집착하게 되는 거라. '갖고 싶다' 할 거 같으면 그거 어쨌든 가질려고 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이러한 느낌들은, 느낌이 항상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즐겁다 해서 항상 즐거울 수 있습니까? 괴롭다 해서 항상 괴로울 수 있느냐는 거라. 그렇지 않거든. 변합니다. 항상하는 것은 없습니다! 즐거울 때 괴로운 것을 동시에 느낄 수 없이 각각 분리돼있고 독립돼 있듯이 느낌이라는 것들도 무상하게 돼있다는 거라. 항상하는 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무상함을 내가 알게 될 거 같으면 그 느낌에 대해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아니면 뭐 슬퍼하거나 하는 감정들로 발전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느낌의 무상함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느낌의 본래 성질을 보게 돼서 지혜로 이끌어주는 방법이 느낌에 대한 관찰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느끼는 거는 느낌을 통해서 뭘 알려고 그럽니까?
즐겁거나 기쁨을 주는 것들이거든. 그러니까 음악도 들을려고 그러고 영화도 볼려고 그러고, 그거는 뭐 때문에 그럽니까? 만족을 얻기 위한 겁니다. 또 고통스럽고 싫은 것들은 왜 고통스럽고 싫어합니까? 만족을 안 주기 때문에 그럽니다.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그러니까 만족과 불만족 때문에 우리는 느낌을 취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족과 불만족도 그것도 변하는 성질이라는 거라. 느낌은 발전되면 그렇게 발전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발전되기 전에 중단하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중단할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느낌에는 통상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즐겁고, 괴롭고, 그다음에 무덤덤한 느낌!
즐거운 느낌은 부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괴로운 것으로 이해해라.
괴로운 느낌은 화살처럼 이해해라. 화살이 내한테 콱 박혔다고 생각해봐.
그리고 무덤덤한 느낌은 무상한 것으로 이해해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으로 이해해버리면 즐거운 느낌을 오래도록 취할려고 해서 거기서 즐거움이나 기쁨을 받는 만족감을 가질려고 하지 않을 거고.
괴로운 느낌을 화살이라고 할 거 같으면 아픈데, 괴로운 느낌이 아픈데 이걸 괴로운걸 뽑을려고 할 거 아니라. 그래서 괴로운 느낌을 빨리 몰아낼려고 하게 되는 것이고.
무덤덤한 느낌은, 무상한 것은 변해가는 겁니다. 무덤덤한 느낌은 어떤 면에서는 어리석은 느낌과 마찬가집니다. 어리석게 아무것도 안 하고 멍청하게 이렇게 있으면서 받는 느낌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식물인간과 마찬가집니다. 그거는 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라. 그래서 아! 이렇게 참 무상한 것이구나. 하루빨리 내가 공부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즐거운 것은 괴로운 것으로 이해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이해하고, 무덤덤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무상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고 얘기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을 괴로운 것으로 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겁니다. 즐거운 느낌이 항상 지속하는 것은 아니죠. 변화를 겪습니다. 변화를 겪는 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렇게 변화하고 즐거운 것이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갓 같으면 그거는 만족할 수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은 결국은 불만족이라는 거라. 괴로운 것이다 그렇게 봐라는 거라.
괴로운 느낌을 화살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괴로움을 만들고 이 고통을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정신적으로까지 발전해서 슬퍼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게 만든다는 거라. 화살이라는 것은 관통하는 겁니다. 육체적인 괴로움만 오면 좋은데 이놈이 그로 인해서 정신적인 것으로까지 자꾸 발전한다는 거라. 화살과 같이 빠르게 그렇게 관통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괴로운 느낌을 받을 때는 이 화살이 내가 첫 번째 화살은 받을지 몰라도 두 번째까지 받지는 말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먹어라는 거라. 그래서 화살로 보고 괴로운 느낌을 멈추도록 해야 됩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고통으로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화살을 두 번 세 번 맞는 느낌이라는 거라.
그래서 바르게 수행하는 것은 이 괴로운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즐거움으로 바꿀려고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새로운 괴로운 고통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 느낌 자체만 갖다가 관찰해야 된다는 거라.
보통 우리는 괴로우면 어떻게 합니까?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다리를 펴고 또 즐거운 걸 찾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하는 것은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현명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그 즐거움은 또 안 변합니까? 즐거움은 또 괴롭게 변하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게 자꾸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즐거운 것은 괴로운 것으로 보고 괴로운 것은 화살로 봐라 하고 얘기합니다.
이 느낌이 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게끔 가르쳐주는 겁니다.
괴로운 것을 화살로 보지 않을 거 같으면 즐거움을 찾을려고 한다는 거라. 그건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이라. 괴로운 것들은 화살로 봐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분명하게 해야 될 것들을 가르쳐 준다는 거라. 이래서 느낌을 잘 관찰할 거 같으면 우리한테는 굉장히 유익한 일들을 가져오게 되기 때문에 느낌을 관찰하라.
이러한 느낌들은 분명하게 여섯 가지 감각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자극받으면 생깁니다.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그중에 하나가 자극받으면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눈과 밖의 사물 대상에 인해서 안식이 생겨나서, 이 눈과 밖의 대상과 안식이라는 것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만나는 것, 접촉이 생겼을 때 이 접촉에 인해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이 생겨납니다.
귀와 소리와 귀의 인식도 마찬가지이고, 코와 냄새도 마찬가지고, 혀와 맛도 마찬가지고, 몸과 물체도 마찬가지고, 마음과 마음의 그 대상도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그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느낌들이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느낌들이 즐겁거나 괴로운 것이라 해서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럼 뭐 눈감고 사물 대상 보지 않고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항상 그렇게 살 수 없죠! 그게 평온하다 해가지고 안 보면 좋지 해갖고 안 보고 살 수 있습니까? 안 되죠.
우리는 눈이 없이 살 수도 없지만 대상없이 살 수도 없습니다. 그다음에 인식하지 않고도 살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세 가지는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 세 가지가 이렇게 접촉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우리가 산다는 거 자체가 이 세 가지 접촉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만나서 생기는 접촉과 느낌 이것이 수행에서 중요한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한 건 뭐냐면 이 느낌이라는 건 생각보다 앞서거든!
느낌이 있고 나서 생각이 일어납니다. 생각 먼저 해서 느낌이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리를 한번 봅시다.
고통스런 느낌이 오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분노가 오죠! 그다음에 분노가 오니까 어떻게 돼? 싫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느낌으로 인해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생각이 먼저 일어난다 할 거 같으면 우리는 참 관찰하기 힘들 거라. 생각이라는 건 오리무중이니까. 참 관찰하기 힘들거든.
보통 사람들은 화가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화를 꼭 참든지 안 그러면 화를 팍 분출해버리든지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이게 전부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중도는 그런 게 아니죠! 양극단입니다. 억제하는 거나, 분출하는 거 이 양극단을 떠나라고 그랬거든.
호화롭게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고, 자기 몸을 극단적으로 제어해서 고행을 하는 것도 하나의 극단입니다. 분노를 억제하고 참는 것은 그렇게 제어하는 겁니다. 몸이나 마음이나. 그럼 분출하는 것은 뭡니까? 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겁니다. 욕망입니다. 그것도 양극단이라는 겁니다.
그럼 양극단을 떠나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수행할 때는 그 느낌들도 억제해서는 안 되겠죠! 그러고 또 느낌들을 분출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통이나 즐거움이나 이런 느낌들이 생겼을 때는 '아! 고통스런 느낌이구나 아니면 즐거운 느낌이구나' 하고 알아차려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 양극단 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명하게 중도를 얘기하신 겁니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중도라는 거라.
그렇게 '아, 고통이구나. 즐거운 느낌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거 같으면 적어도 분노나 싫은 생각이 일어날 기회는 없다는 거라.
왜? 느낌으로 인해서 생각은 일어나는 거니까! 그런 생각을 일으킬 기회조차도 주지 않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고통을 참을 필요도 없고 분출할 필요도 없는 거라. 그래서 느낌이 생각보다 앞선다 하는 거라.
그래서 생각을 관찰한다 할 거 같으면 이미 화가 일어나고 있는 상태, 아니면 화를 갖다가 억누르고 있는 상태를 알 수밖에 없는데, 느낌을 관찰할 거 같으면 그 이전에 이미, 참는 거나 분출하는 거나 이 이전에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 관찰해나갈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자! 느낌은 통상적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그 느낌에는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죠!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겪으면 어떻게 됩니까? 근심하고 또 슬퍼하고 상심하고 막 울부짖고 가슴을 치고 그럽니다. 그거는 뭡니까? 정신적인 괴로움이죠! 이렇게 괴로움이든 즐거움이든, 뭐 먹을 때 맛있는 거 맛난 거 먹었다, 그럼 즐거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육체적으로 느끼는 즐거운 느낌입니다. 그거로 인해서 어떻게 됩니까? 나는 기뻐하고 환희한다는 거라. 정신적인 즐거움입니다.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인데, 보통 육체를 통해서 정신적인 느낌들을 겪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을 접하게 되면 보통 우리는 배척할려고, 저항할려고 그럽니다. 즐거운 느낌은 누릴려고 그럽니다. 그거는 왜 그렇습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억제하거나 분출하는 방법 외에는 모르기 때문에, 즐거운 건 더 취할려 그러고, 괴로운 건 더 배척해버리고 그럴려고 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이걸 갖다가 부처님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범부중생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느낌은 저항할려고 하거나 또 취할려고 하거나 이런 것들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게 돼있다는 거라. 왜? 우리가 이때까지 쭉 습관화 해왔거든. 그래서 느낌을 관찰할 때는 그러한 것들을 버려버려야 된다 하는 겁니다. 버리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 알아차려라.
자!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괴롭고, 즐겁고, 무덤덤한 느낌. 인제 하나씩 그걸 관찰하는 법을 해봅시다.
보통 통상적으로는 수행할 때 뭐부터 일어납니까?
괴로운 느낌부터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고통스런 느낌이 있으니까.
이 고통, 괴로움을 느낄 때는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그것을 저항할려고도 하지 말고 억압할려고도 하지 말아라. 혐오해서 벗어날려고도 하지 말아라.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잠재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는 거라.
이렇게 관찰하기 위해서,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수행할 때 다리에 통증이 있다. 어떻게 수행합니까? 통상적으로 보면 이 고통을 제거할려는 목적으로 수행을 합니다. 왜? 고통스러우니까!
대부분 그리합니다. 왜? 고통스러운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으니까, 편안해지고 싶으니까! 편안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을 거 같으면 이 고통을 제거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냅둬버리면 되지 자기가 편안할 생각이 없는데 뭐 하러 그걸 제거할려고 그래. 그렇거든 고통스러우니까 이걸 제거할려고 알아차리는 거라.
편하고자 하는 거는 뭡니까? 그것도 욕망입니다. 탐욕입니다.
알아차리면서 이미 마음이 오염되어버린 상태에서 알아차리게 된다는 거라.
번뇌를 가지고 수행을 하게 되는 거니까, '고통' '고통' 하고 제거하려고 알아차리게 되니까 어떻게 돼? 이게 바로 제거가 되겠습니까? 제거는 되겠죠. 그런데 굉장히 느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실제 고통을 보는 것이 느릴 수밖에 없고 아주 미약하다는 거라. 잠깐 '아고, 이게 고통이구나' 하는 건 알지만 이미 마음에서 편할려고, 이 고통스러운 걸 제거할려고 하는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하는 거라. 그 실재하는 고통을 오래도록 보지 못하는 거라.
그럼 이걸 어떻게 알아차려야 되겠어요? '이놈의 자식, 고통 니가 뭔가 한번 보자'하고 막 이렇게 꿰뚫어 보듯이 싸우듯이 이렇게 알아차려야 됩니까? 그것도 아니죠. 싸우듯이 막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화냄이라는 성냄이라는 또 다른 번뇌가 합쳐져서 수행을 하게 됩니다. 알아차리게 됩니다. 싸우듯이 이것을 관찰해서도 똑 마찬가지로 참 성품을 보기가 어렵다는 거라. 굉장히 느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결국에는 져! 고통한테 자기가!
그러면 이 고통을 제거할려고 알아차려도 안 되고, 요놈 지가 뭔가 하고 싸우듯이 관찰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이 고통을 관찰할 때 알아차릴 때는 어떻게 관찰해야 돼요?
느낌은 어떻다고 그랬습니까? 무상하다고 그랬습니다. 무상하다고! 그게 고통의 참된 성품입니다. 고통이 고통 그대로 가만히 있을 거 같으면, 내가 관찰을 해도 아플 거면 아플 거고, 즐거울 거면 즐거울 건데 무상하지 않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그거 관찰할 이유가 뭐 있겠어? 무상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관찰하는 거라.
그러면 고통을 관찰하는 것은 무상한 것을 관찰하기 위해서 고통그러운 느낌을 관찰하는 거라. 그러면 고통을 관찰할 때는 내가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음! 좋은 대상 나타났구나. 이 무상의 참된 성품을 고통을 통해서 내가 알아차려보겠다.' 하는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을 절대 제거를 못해. 고통을 알지도 못하고.
보통 보면 고통스런 느낌이 일어나면 몸도 긴장하고 마음도 긴장하게 됩니다.
긴장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집중을 많이 하든지 아니면 노력을 많이 하든지 하게 돼있습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은 뭡니까? 만약에 내가 이렇게 돼있는 상태에서 긴장을 하고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이건 노력이 과다하고 있다는 거라. 노력이 없을 거 같으면 이렇게 있질 않습니다. 그냥 이게 움직여져 버리지.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거죠. 힘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거라.
몸이 긴장하면 마음도 따라 긴장을 해버립니다.
수행은 집중과 노력이 균형을 맞춰줘야 되는데 이것이 어느 부분이 과해져 버렸다는 거라. 힘이 많이 들어가 있든지, 아니면 하나의 대상에 폭 집중해가지고 꿰뚫어 보듯이 이렇게 하고 있든지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고통스런 느낌의 참된 성품을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게 몸과 마음의 긴장을 먼저 풀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에 마음을 얹어 놓을려고 해야 되지,
고통도 고통이라는 모양이나 형태를 볼 거 같으면 이것은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왜? 모양이나 형태는 뭐라 그랬습니까? 개념이라 그랬습니다. 개념! 수행은 개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집중력만 자꾸 강해지니까 어떻게 돼요? 꿰뚫어 보듯이 이놈을 갖다 관찰하게 되는 거라. 그거는 어떻게 됩니까? 집중력만 강할 뿐인것이지 실재 성품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느낌을, 고통스런 느낌이 있으면 그냥 고통스런 느낌을 살포시 마음만 얹어서, 실재하는 고통스런 느낌은 이 몸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겁니다.
여기에다가 마음을 살포시 얹어서 관찰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왜? 어차피 이 고통도 변해나갈 거니까. 그렇게 마음을 먹고 이걸 관찰해나가야 됩니다.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이 느낌에다가 마음을 살포시 얹으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느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 느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한번 알아본 적이 있습니까? 다리가 구부러져 있다. 여기가 만약에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 어디서 일어납니까? 고통스러운 느낌이 육체의 피부에서 일어납니까? 아니면 살에서 일어납니까? 뼛속에서 일어납니까? 어디서 일어납니까? (수행자 대답)
아는 것은 마음인데 지금 육체적인 고통을 얘기합니다.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 (수행자 대답)
뼈에서 일어납니까? 확실합니까? 그러니까 잘 보라는 거라. 잘 관찰해보라는 거라. 어디서 일어나는지.
처음에 조금 육체적인 느낌이 일어날 때는 절대 뼈에서 안 일어납니다. 뼈가 욱신거리지는 않죠? 처음에는 이 피부 같은데 이런 데서 살포시 고통스런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요놈이 점점 더 강도가 세지면서 어떻게 됩니까? 뼈가 아프듯이 아픕니다.
고통도 내가 관찰할 거 같으면 요게 장소를 바꾸어나간다는 겁니다.
피부나 살갗에 있다가 요놈이 뼛속으로도 넘어간다는 거라. 고통은 분명히 장소를 이동합니다. 한 장소에만 그대로 일어날 거 같으면 얼마나 좋게.
이렇게만 관찰을 해도 이미 여러분들은 고통을 관찰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대부분 어떻게 합니까?
고통을 관찰하면서 이게 어디서 고통이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왜? 집중력만 강해졌지, 그것을 실재 변하는 성품들을 관찰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없기 때문에, 긴장이 돼있기 때문에, 몸도 긴장이 돼있고 마음도 긴장이 돼있으면 대상이 묶여버립니다. 묶여버릴 것 같으면 이놈의 고통이 장소를 이동한 걸 모르는 거라.
그리고 그 고통스런 느낌이 강도가 얼마나 센지 알 수 있습니까?
비교를 해봤을 때, 손을 탁 치는 정도의 고통스런 느낌이 있었는지 아니면 손가락이 탁 부러졌을 때 오는 고통의 느낌인지 그 강도를 알 수가 있습니까? 그 강도도 변하죠! 안 변합니까? 변합니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라 하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요 고통스러운 느낌에 살포시 마음을 그 고통스런 느낌에다가 얹으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요 고통스런 느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는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고통스런 느낌이 어느 정도의 강도인지는 내가 파악을 해야 만이 내가 그것을 관찰할 거 아니라. 알아차릴 거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집중과 노력의 균형을 맞춰주는 길입니다.
이렇게 맞춰지고 나면 대상에다가 쑤시면 '쑤심' '쑤심', 통증이면 '통증' '통증' 하고 명칭을 붙여줄 수 있습니다. 쑤시는데 '통증' '통증'하고 명칭을 붙일 수도 없고, 통증이 일어나는데도 '쑤심' '쑤심'하고 명칭을 붙일 수도 없다는 거라. 그래서 정확하게 명칭을 붙여줘야 된다는 거라.
만약에 쑤신다, '쑤심' '쑤심' 하고 명칭을 붙이면 이미 그런 상태에서 두세 번 정도 '쑤심' '쑤심' 할 거 같으면 이 쑤시는 게 굉장히 강해지는 걸 느낍니다.
그래도 다시 '쑤심' '쑤심'하고 관찰을 할 거 같으면 이 쑤시는 게 현격하게 감소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쑤시는 게 요놈의 살갗이나 요런데 쑤시다가 인제는 뼛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이동하는 것들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장소를 이동하는 것도 더 강해지니까 이거는 통증이구나 해서 '통증' '통증'하고 또 관찰하게 됩니다.
고통과 그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과 그 고통을 알아차리는 마음과 세 가지를 분리시킬 수가 있다는 겁니다.
분명하게 자기가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 이게 몸의 현상이고 이게 마음의 현상이구나 하는 걸 갖다가 이해를 하게 될 때 고통스런 느낌은 현저하지 않게 됩니다. 많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들 오래도록 앉아있으면 다리가 고통스럽죠.
왜? 몸과 마음 또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이 세 가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자꾸 일어나는데 그걸 구분할 수 있을려고 할 거 같으면 그 정도 고통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하고 관찰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것이 뼛속에서 일어나는지 살갗에서 일어나는지 요놈의 고통의 정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이해를 하고 나서 균형을 맞춰줘서, 노력과 집중이라는 것을 균형을 맞춰줘서 이걸 관찰하게 될 때 고통이 증가하고 감소하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도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미 그때는 내가 그런 고통스런 느낌이 많이 일어나지지 않습니다.
이미 몸과 마음의 관계를 이해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고통스런 느낌이 나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는 거라.
물론 그러다가 쭉 더 수행을 해나가서 지혜가 성숙해나가다가 삼법인이 드러날 때가 되면 또 고통이 굉장히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때는 막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진동이 일어난다든지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메스꺼워가지고 토해내려 하는 느낌들도 일어나고 그럽니다. 지금 뭐 '고통' '고통' 아니면 '즐거움' '즐거움' 이런 게 아니고, 그때는 아주 그런 느낌들이 강하게 일어나집니다. 그거는 또 그거대로 관찰대상입니다.
그렇게 현저하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몸과 마음의 관계를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날 거 같으면, 고통스런 느낌들은 여러분에게 크게 영향을 안 미칩니다. 적어도 그렇게 될 때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어야 됩니다.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고통스런 느낌에 대해서 하고, 그다음에 즐거운 느낌, 무덤덤한 느낌에 대한 것들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기초수행11. 느낌관찰3 (고통스러운 느낌) (20071120)
오늘은 느낌에 대한 관찰 세 번째 부분입니다.
편하게 좀 앉으세요. 인제 느낌에 대한 이해는 조금 했을 거라고 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게 느낌에 대한 이해가 뭡니까?
살아가는 것은 느낌에 의해서 살아가는 거라는 것, 모든 것은 느낌으로 우리는 이해를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이와 살아있는 이를 비교해본 부분이 있고, 그래서 느낌·감각으로 인해서 보통 우리는 살아있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이 느낌을 느낌으로써만 알아차릴 것 같으면 참 좋은데 대부분 우리는 그리 안 하죠. 느낌으로 인해서 취하고 내버리고 이렇게들 한다는 거라. 그렇게 하다 보니까 욕심내고 화내고 이런 행동 패턴으로 바뀌어진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 느낌의 중요함이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수행법을 가르칠 때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하라 하는 것은 그런 '맨느낌', 처음으로 받아지는 느낌들을 관찰대상으로 해서 거기서 더 이상 발전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할 때 어떻습니까? 처음에 배를 관찰하고 '일어남' '사라짐' 이렇게 하면, 거기서 처음부터 느낌을 바로 아는 건 아니죠? 딱딱한 느낌이라든지 움직임이라든지 아니면 뜨거운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아는 건 아닐 거라.
처음 수행할 때 어떻게 합니까? 보통 모양이나 형태들을 보죠? 그렇죠!
안 그러면 경행할 때도 그렇게 발 모양을 보지마라 그래도 맨 처음 보이는 건 발 모양부터 보입니다. 발을 내려놓을 때는 발이 이렇게 내려가는 것이 보이거든요. 모양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꿈치가 먼저 닿는지 뒷꿈치가 먼저 닿는지 내가 그 모양이나 형태가 먼저 눈에 띄게 돼있습니다.
그건 수행할 때 어쩔 수 없습니다. 앉아서 좌선할 때도 배의 모양이 먼저 보이게 되어있고, 경행할 때도 발의 모양이나 형태들이 먼저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양이나 형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걸 '개념'이라 그럽니다. 빨리어로는 '빤냣띠(paññatti)'라고 얘기합니다.
개념에 휩싸여버릴 것 같으면 수행에 진척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개념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거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과라는 걸 탁 떠올린다. 그럼 사과라는 모양이 있단 말이라. 모양이나 형태. 그러면 내가 떠올린 개념하고 다른 사람이 떠올린 개념하고 또 다를 거란 말이라. 그렇지만 내가 떠올린 개념은 그 개념을 내가 스스로 바꾸어주기 전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 사과의 형태나 모양은 내가 떠올리면 계속 똑같이 그렇게 됩니다.
형태나 모양은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개념을 일단은 놓아버려야 만이 '실재'를 보게 됩니다. '실재'를 보통 빨리어로 '빠라맛타(paramatt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빤냣띠를 놓아버리고 빠라맛타를 알려고 노력해라 하는 거는, 모양이나 형태 개념들을 놓아버리고 실제 일어나는 것들, 뭐 어떤 것이 실제 일어납니까? 뜨거운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딱딱한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실재하는 것들입니다.
왜? 왜 실재하는 것이라고 그럽니까? 그 느낌들은 변하니까!
모든 사물 모든 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실재한다고 할 거 같으면 변해가야 됩니다. 사물의 이치로 봤을 때는!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팽창하는 느낌이나 움직이는 느낌들을 꿰뚫어 보듯이 집중해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좌선할 때는 딱딱하고 팽창하고 움직이고 뜨겁고 하는 그런 느낌들을 알고, 경행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가볍고 무겁고 하는 움직임의 요소들이라는 그런 느낌들을 알도록 먼저 하라 라고 그렇게 합니다.
처음 수행할 때는 그게 잘 안됩니다.
걸어갈 때는 다리가 보일 거고, 앉아서 수행할 때는 배가 보일 거고, 이렇게 빤냣띠가 분명합니다. 그 딱딱한 느낌이나 이런 느낌 빠라맛타는 분명하지 않는데 수행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조금씩 더 수행이 무르익어가고 지혜가 조금씩 더 성숙해지면 빠라맛타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때는 형태나 모양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고 단지 단단함, 수축함, 움직임 이런 것들의 느낌들만 증가하는 것이 현저하게 보입니다.
실재하는 것이 현저할 때는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숨어버립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정확하게 할 거 같으면 사마타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숨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사마타 수행은 변하지 않는 대상, 하나의 대상에 몰두하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개념과 마찬가집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변하는 대상, 실재하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사마타 수행은 줄어들게 되고, 위빳사나 수행이 안 되니까 하나의 대상에 자꾸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이 돼버리는 형태들을 띠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행하다 보면 아! 내가 지금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구나,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눈치를 채야된다는 겁니다.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인제는 어느 정도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구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돼야 만이 빨리 내가 전환을,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모양이나 형태가 보인다면 아! 이건 아니지 하면서 실재를 자꾸 볼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되서 담마가 그때서야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느낌이 그마만큼 소중한 것인데, 느낌은 어떻습니까?
즐거울 때 괴로운 느낌이 같이 있습니까? 괴로울 때 즐거운 느낌이 있습니까? 없죠! 각각이죠! 따로따로입니다. 절대 이와 같은 느낌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즐거운 느낌이 있는데 누가 자극을 할 경우에 내가 괴로운 느낌으로 변화될 수는 있습니다. 괴로운 느낌도 즐거운 느낌으로 변화될 수가 있고.
그래서 부처님이 분명하게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는 괴로운 느낌이나 무덤덤한 느낌은 경험할 수 없다 하고 악기웨사나라고 하는 분한테 부처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다른 경우도 꼭 마찬가지고! 그러면 느낌이라는 것은 각각 독립적이라는 뜻입니다. 각각 독립적! 그래서 동시에 내가 그걸 인식하고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죠!
그 느낌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어떻게 일어납니까?
눈을 통해서 밖에 있는 대상이 내 눈을 통해서 들어와서 그것을 인식하고, 인식함으로 인해서 나에게 느낌들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눈과 밖의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안식-눈이니까 눈이라는 인식, 이 세 개가 합해졌을 때 느낌이란 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느낌이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아! 저거 좋은 거', 아니면 '아! 저거 싫은 거'하고 집착하게 되죠. 그 집착으로 인해서 말이나 행동들 이런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느낌을 관찰하라는 의미는 뭐냐면 집착하기 이전의 느낌만을 관찰할 거 같으면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이런 느낌으로만 알게 되는 것이지 '저걸 가져야 된다', 아니면 '버려야 된다' 하는 이런 상태까지는 가지 않게 된다 하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힘드는 게 뭐 때문에 그런 겁니까? 갖고 싶은 거 못 가지고, 내버리고 싶은 거 못 내버리고, 이러니까 힘든 거 아닙니까?
느낌 자체로 봤을 때는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집착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즐겁구나, 괴롭구나 하는 느낌만 있을 뿐인 것이지, 그래서 그것이 수행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집착을 하다보니까 어떻게 돼요? 못 가지니까 내가 망상을 피우고 가질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마음이 점점 더 오염돼서 '나' '나라는 존재' 이런 것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왜 부처님이 이렇게 느낌을 알아차리라고 하는가 하면,
어쨌든 우리는 인식한다는 거는 이런 접촉으로 인해서 인식하는 겁니다. 접촉이 일어나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무리 저기 대상이 있고 내가 그걸 인식을 할려고 한다, 그런데 눈 감아 버리면 인식합니까? 못하죠! 아무리 내가 귀가 있고 저 밖에 있는 소리를 인식할려고 하더라도 저 멀리 소리가 있는 거는 내가 인식 못합니다. 소리가 없는 겁니다. 그 파동이 나한테 못 미치니까.
어쨌든 인식할려면 이런 세 가지가 합해져야 만이, 접촉해야 만이 인식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접촉에 의해서 첫 번째 일어나는 반응이 뭡니까? 느낌입니다!
그 느낌은 뭐로 느낍니까? 몸이 느낍니까? 마음이 느끼는 거죠!
마음이 반응하는 첫 번째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정복하고 싶은 사람은 맨 첫 번째 단추인 접촉을 관찰하라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알아차리지 않으면 이 느낌은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집착하게 되고, 갈망하게 되고, 그래서 그 갈망 갈애의 원인이 돼서 그것이 강해지면 어떻게 돼? 집착하게 되는 거라. '갖고 싶다' 할 거 같으면 그거 어쨌든 가질려고 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이러한 느낌들은, 느낌이 항상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즐겁다 해서 항상 즐거울 수 있습니까? 괴롭다 해서 항상 괴로울 수 있느냐는 거라. 그렇지 않거든. 변합니다. 항상하는 것은 없습니다! 즐거울 때 괴로운 것을 동시에 느낄 수 없이 각각 분리돼있고 독립돼 있듯이 느낌이라는 것들도 무상하게 돼있다는 거라. 항상하는 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무상함을 내가 알게 될 거 같으면 그 느낌에 대해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아니면 뭐 슬퍼하거나 하는 감정들로 발전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느낌의 무상함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느낌의 본래 성질을 보게 돼서 지혜로 이끌어주는 방법이 느낌에 대한 관찰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느끼는 거는 느낌을 통해서 뭘 알려고 그럽니까?
즐겁거나 기쁨을 주는 것들이거든. 그러니까 음악도 들을려고 그러고 영화도 볼려고 그러고, 그거는 뭐 때문에 그럽니까? 만족을 얻기 위한 겁니다. 또 고통스럽고 싫은 것들은 왜 고통스럽고 싫어합니까? 만족을 안 주기 때문에 그럽니다.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그러니까 만족과 불만족 때문에 우리는 느낌을 취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족과 불만족도 그것도 변하는 성질이라는 거라. 느낌은 발전되면 그렇게 발전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발전되기 전에 중단하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중단할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느낌에는 통상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즐겁고, 괴롭고, 그다음에 무덤덤한 느낌!
즐거운 느낌은 부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괴로운 것으로 이해해라.
괴로운 느낌은 화살처럼 이해해라. 화살이 내한테 콱 박혔다고 생각해봐.
그리고 무덤덤한 느낌은 무상한 것으로 이해해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으로 이해해버리면 즐거운 느낌을 오래도록 취할려고 해서 거기서 즐거움이나 기쁨을 받는 만족감을 가질려고 하지 않을 거고.
괴로운 느낌을 화살이라고 할 거 같으면 아픈데, 괴로운 느낌이 아픈데 이걸 괴로운걸 뽑을려고 할 거 아니라. 그래서 괴로운 느낌을 빨리 몰아낼려고 하게 되는 것이고.
무덤덤한 느낌은, 무상한 것은 변해가는 겁니다. 무덤덤한 느낌은 어떤 면에서는 어리석은 느낌과 마찬가집니다. 어리석게 아무것도 안 하고 멍청하게 이렇게 있으면서 받는 느낌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식물인간과 마찬가집니다. 그거는 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라. 그래서 아! 이렇게 참 무상한 것이구나. 하루빨리 내가 공부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즐거운 것은 괴로운 것으로 이해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이해하고, 무덤덤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무상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고 얘기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을 괴로운 것으로 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겁니다. 즐거운 느낌이 항상 지속하는 것은 아니죠. 변화를 겪습니다. 변화를 겪는 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렇게 변화하고 즐거운 것이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갓 같으면 그거는 만족할 수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은 결국은 불만족이라는 거라. 괴로운 것이다 그렇게 봐라는 거라.
괴로운 느낌을 화살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괴로움을 만들고 이 고통을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정신적으로까지 발전해서 슬퍼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게 만든다는 거라. 화살이라는 것은 관통하는 겁니다. 육체적인 괴로움만 오면 좋은데 이놈이 그로 인해서 정신적인 것으로까지 자꾸 발전한다는 거라. 화살과 같이 빠르게 그렇게 관통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괴로운 느낌을 받을 때는 이 화살이 내가 첫 번째 화살은 받을지 몰라도 두 번째까지 받지는 말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먹어라는 거라. 그래서 화살로 보고 괴로운 느낌을 멈추도록 해야 됩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고통으로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화살을 두 번 세 번 맞는 느낌이라는 거라.
그래서 바르게 수행하는 것은 이 괴로운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즐거움으로 바꿀려고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새로운 괴로운 고통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 느낌 자체만 갖다가 관찰해야 된다는 거라.
보통 우리는 괴로우면 어떻게 합니까?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다리를 펴고 또 즐거운 걸 찾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하는 것은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현명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그 즐거움은 또 안 변합니까? 즐거움은 또 괴롭게 변하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게 자꾸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즐거운 것은 괴로운 것으로 보고 괴로운 것은 화살로 봐라 하고 얘기합니다.
이 느낌이 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게끔 가르쳐주는 겁니다.
괴로운 것을 화살로 보지 않을 거 같으면 즐거움을 찾을려고 한다는 거라. 그건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이라. 괴로운 것들은 화살로 봐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분명하게 해야 될 것들을 가르쳐 준다는 거라. 이래서 느낌을 잘 관찰할 거 같으면 우리한테는 굉장히 유익한 일들을 가져오게 되기 때문에 느낌을 관찰하라.
이러한 느낌들은 분명하게 여섯 가지 감각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자극받으면 생깁니다.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그중에 하나가 자극받으면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눈과 밖의 사물 대상에 인해서 안식이 생겨나서, 이 눈과 밖의 대상과 안식이라는 것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만나는 것, 접촉이 생겼을 때 이 접촉에 인해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이 생겨납니다.
귀와 소리와 귀의 인식도 마찬가지이고, 코와 냄새도 마찬가지고, 혀와 맛도 마찬가지고, 몸과 물체도 마찬가지고, 마음과 마음의 그 대상도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그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느낌들이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느낌들이 즐겁거나 괴로운 것이라 해서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럼 뭐 눈감고 사물 대상 보지 않고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항상 그렇게 살 수 없죠! 그게 평온하다 해가지고 안 보면 좋지 해갖고 안 보고 살 수 있습니까? 안 되죠.
우리는 눈이 없이 살 수도 없지만 대상없이 살 수도 없습니다. 그다음에 인식하지 않고도 살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세 가지는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 세 가지가 이렇게 접촉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우리가 산다는 거 자체가 이 세 가지 접촉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만나서 생기는 접촉과 느낌 이것이 수행에서 중요한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한 건 뭐냐면 이 느낌이라는 건 생각보다 앞서거든!
느낌이 있고 나서 생각이 일어납니다. 생각 먼저 해서 느낌이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리를 한번 봅시다.
고통스런 느낌이 오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분노가 오죠! 그다음에 분노가 오니까 어떻게 돼? 싫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느낌으로 인해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생각이 먼저 일어난다 할 거 같으면 우리는 참 관찰하기 힘들 거라. 생각이라는 건 오리무중이니까. 참 관찰하기 힘들거든.
보통 사람들은 화가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화를 꼭 참든지 안 그러면 화를 팍 분출해버리든지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이게 전부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중도는 그런 게 아니죠! 양극단입니다. 억제하는 거나, 분출하는 거 이 양극단을 떠나라고 그랬거든.
호화롭게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고, 자기 몸을 극단적으로 제어해서 고행을 하는 것도 하나의 극단입니다. 분노를 억제하고 참는 것은 그렇게 제어하는 겁니다. 몸이나 마음이나. 그럼 분출하는 것은 뭡니까? 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겁니다. 욕망입니다. 그것도 양극단이라는 겁니다.
그럼 양극단을 떠나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수행할 때는 그 느낌들도 억제해서는 안 되겠죠! 그러고 또 느낌들을 분출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통이나 즐거움이나 이런 느낌들이 생겼을 때는 '아! 고통스런 느낌이구나 아니면 즐거운 느낌이구나' 하고 알아차려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 양극단 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명하게 중도를 얘기하신 겁니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중도라는 거라.
그렇게 '아, 고통이구나. 즐거운 느낌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거 같으면 적어도 분노나 싫은 생각이 일어날 기회는 없다는 거라.
왜? 느낌으로 인해서 생각은 일어나는 거니까! 그런 생각을 일으킬 기회조차도 주지 않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고통을 참을 필요도 없고 분출할 필요도 없는 거라. 그래서 느낌이 생각보다 앞선다 하는 거라.
그래서 생각을 관찰한다 할 거 같으면 이미 화가 일어나고 있는 상태, 아니면 화를 갖다가 억누르고 있는 상태를 알 수밖에 없는데, 느낌을 관찰할 거 같으면 그 이전에 이미, 참는 거나 분출하는 거나 이 이전에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 관찰해나갈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자! 느낌은 통상적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그 느낌에는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죠!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겪으면 어떻게 됩니까? 근심하고 또 슬퍼하고 상심하고 막 울부짖고 가슴을 치고 그럽니다. 그거는 뭡니까? 정신적인 괴로움이죠! 이렇게 괴로움이든 즐거움이든, 뭐 먹을 때 맛있는 거 맛난 거 먹었다, 그럼 즐거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육체적으로 느끼는 즐거운 느낌입니다. 그거로 인해서 어떻게 됩니까? 나는 기뻐하고 환희한다는 거라. 정신적인 즐거움입니다.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인데, 보통 육체를 통해서 정신적인 느낌들을 겪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을 접하게 되면 보통 우리는 배척할려고, 저항할려고 그럽니다. 즐거운 느낌은 누릴려고 그럽니다. 그거는 왜 그렇습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억제하거나 분출하는 방법 외에는 모르기 때문에, 즐거운 건 더 취할려 그러고, 괴로운 건 더 배척해버리고 그럴려고 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이걸 갖다가 부처님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범부중생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느낌은 저항할려고 하거나 또 취할려고 하거나 이런 것들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게 돼있다는 거라. 왜? 우리가 이때까지 쭉 습관화 해왔거든. 그래서 느낌을 관찰할 때는 그러한 것들을 버려버려야 된다 하는 겁니다. 버리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 알아차려라.
자!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괴롭고, 즐겁고, 무덤덤한 느낌. 인제 하나씩 그걸 관찰하는 법을 해봅시다.
보통 통상적으로는 수행할 때 뭐부터 일어납니까?
괴로운 느낌부터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고통스런 느낌이 있으니까.
이 고통, 괴로움을 느낄 때는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그것을 저항할려고도 하지 말고 억압할려고도 하지 말아라. 혐오해서 벗어날려고도 하지 말아라.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잠재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는 거라.
이렇게 관찰하기 위해서,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수행할 때 다리에 통증이 있다. 어떻게 수행합니까? 통상적으로 보면 이 고통을 제거할려는 목적으로 수행을 합니다. 왜? 고통스러우니까!
대부분 그리합니다. 왜? 고통스러운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으니까, 편안해지고 싶으니까! 편안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을 거 같으면 이 고통을 제거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냅둬버리면 되지 자기가 편안할 생각이 없는데 뭐 하러 그걸 제거할려고 그래. 그렇거든 고통스러우니까 이걸 제거할려고 알아차리는 거라.
편하고자 하는 거는 뭡니까? 그것도 욕망입니다. 탐욕입니다.
알아차리면서 이미 마음이 오염되어버린 상태에서 알아차리게 된다는 거라.
번뇌를 가지고 수행을 하게 되는 거니까, '고통' '고통' 하고 제거하려고 알아차리게 되니까 어떻게 돼? 이게 바로 제거가 되겠습니까? 제거는 되겠죠. 그런데 굉장히 느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실제 고통을 보는 것이 느릴 수밖에 없고 아주 미약하다는 거라. 잠깐 '아고, 이게 고통이구나' 하는 건 알지만 이미 마음에서 편할려고, 이 고통스러운 걸 제거할려고 하는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하는 거라. 그 실재하는 고통을 오래도록 보지 못하는 거라.
그럼 이걸 어떻게 알아차려야 되겠어요? '이놈의 자식, 고통 니가 뭔가 한번 보자'하고 막 이렇게 꿰뚫어 보듯이 싸우듯이 이렇게 알아차려야 됩니까? 그것도 아니죠. 싸우듯이 막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화냄이라는 성냄이라는 또 다른 번뇌가 합쳐져서 수행을 하게 됩니다. 알아차리게 됩니다. 싸우듯이 이것을 관찰해서도 똑 마찬가지로 참 성품을 보기가 어렵다는 거라. 굉장히 느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결국에는 져! 고통한테 자기가!
그러면 이 고통을 제거할려고 알아차려도 안 되고, 요놈 지가 뭔가 하고 싸우듯이 관찰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이 고통을 관찰할 때 알아차릴 때는 어떻게 관찰해야 돼요?
느낌은 어떻다고 그랬습니까? 무상하다고 그랬습니다. 무상하다고! 그게 고통의 참된 성품입니다. 고통이 고통 그대로 가만히 있을 거 같으면, 내가 관찰을 해도 아플 거면 아플 거고, 즐거울 거면 즐거울 건데 무상하지 않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그거 관찰할 이유가 뭐 있겠어? 무상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관찰하는 거라.
그러면 고통을 관찰하는 것은 무상한 것을 관찰하기 위해서 고통그러운 느낌을 관찰하는 거라. 그러면 고통을 관찰할 때는 내가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음! 좋은 대상 나타났구나. 이 무상의 참된 성품을 고통을 통해서 내가 알아차려보겠다.' 하는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을 절대 제거를 못해. 고통을 알지도 못하고.
보통 보면 고통스런 느낌이 일어나면 몸도 긴장하고 마음도 긴장하게 됩니다.
긴장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집중을 많이 하든지 아니면 노력을 많이 하든지 하게 돼있습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은 뭡니까? 만약에 내가 이렇게 돼있는 상태에서 긴장을 하고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이건 노력이 과다하고 있다는 거라. 노력이 없을 거 같으면 이렇게 있질 않습니다. 그냥 이게 움직여져 버리지.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거죠. 힘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거라.
몸이 긴장하면 마음도 따라 긴장을 해버립니다.
수행은 집중과 노력이 균형을 맞춰줘야 되는데 이것이 어느 부분이 과해져 버렸다는 거라. 힘이 많이 들어가 있든지, 아니면 하나의 대상에 폭 집중해가지고 꿰뚫어 보듯이 이렇게 하고 있든지 그러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고통스런 느낌의 참된 성품을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게 몸과 마음의 긴장을 먼저 풀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에 마음을 얹어 놓을려고 해야 되지,
고통도 고통이라는 모양이나 형태를 볼 거 같으면 이것은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왜? 모양이나 형태는 뭐라 그랬습니까? 개념이라 그랬습니다. 개념! 수행은 개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집중력만 자꾸 강해지니까 어떻게 돼요? 꿰뚫어 보듯이 이놈을 갖다 관찰하게 되는 거라. 그거는 어떻게 됩니까? 집중력만 강할 뿐인것이지 실재 성품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느낌을, 고통스런 느낌이 있으면 그냥 고통스런 느낌을 살포시 마음만 얹어서, 실재하는 고통스런 느낌은 이 몸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겁니다.
여기에다가 마음을 살포시 얹어서 관찰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왜? 어차피 이 고통도 변해나갈 거니까. 그렇게 마음을 먹고 이걸 관찰해나가야 됩니다.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이 느낌에다가 마음을 살포시 얹으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느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 느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한번 알아본 적이 있습니까? 다리가 구부러져 있다. 여기가 만약에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다. 어디서 일어납니까? 고통스러운 느낌이 육체의 피부에서 일어납니까? 아니면 살에서 일어납니까? 뼛속에서 일어납니까? 어디서 일어납니까? (수행자 대답)
아는 것은 마음인데 지금 육체적인 고통을 얘기합니다.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 (수행자 대답)
뼈에서 일어납니까? 확실합니까? 그러니까 잘 보라는 거라. 잘 관찰해보라는 거라. 어디서 일어나는지.
처음에 조금 육체적인 느낌이 일어날 때는 절대 뼈에서 안 일어납니다. 뼈가 욱신거리지는 않죠? 처음에는 이 피부 같은데 이런 데서 살포시 고통스런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요놈이 점점 더 강도가 세지면서 어떻게 됩니까? 뼈가 아프듯이 아픕니다.
고통도 내가 관찰할 거 같으면 요게 장소를 바꾸어나간다는 겁니다.
피부나 살갗에 있다가 요놈이 뼛속으로도 넘어간다는 거라. 고통은 분명히 장소를 이동합니다. 한 장소에만 그대로 일어날 거 같으면 얼마나 좋게.
이렇게만 관찰을 해도 이미 여러분들은 고통을 관찰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대부분 어떻게 합니까?
고통을 관찰하면서 이게 어디서 고통이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왜? 집중력만 강해졌지, 그것을 실재 변하는 성품들을 관찰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없기 때문에, 긴장이 돼있기 때문에, 몸도 긴장이 돼있고 마음도 긴장이 돼있으면 대상이 묶여버립니다. 묶여버릴 것 같으면 이놈의 고통이 장소를 이동한 걸 모르는 거라.
그리고 그 고통스런 느낌이 강도가 얼마나 센지 알 수 있습니까?
비교를 해봤을 때, 손을 탁 치는 정도의 고통스런 느낌이 있었는지 아니면 손가락이 탁 부러졌을 때 오는 고통의 느낌인지 그 강도를 알 수가 있습니까? 그 강도도 변하죠! 안 변합니까? 변합니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라 하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요 고통스러운 느낌에 살포시 마음을 그 고통스런 느낌에다가 얹으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요 고통스런 느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는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고통스런 느낌이 어느 정도의 강도인지는 내가 파악을 해야 만이 내가 그것을 관찰할 거 아니라. 알아차릴 거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집중과 노력의 균형을 맞춰주는 길입니다.
이렇게 맞춰지고 나면 대상에다가 쑤시면 '쑤심' '쑤심', 통증이면 '통증' '통증' 하고 명칭을 붙여줄 수 있습니다. 쑤시는데 '통증' '통증'하고 명칭을 붙일 수도 없고, 통증이 일어나는데도 '쑤심' '쑤심'하고 명칭을 붙일 수도 없다는 거라. 그래서 정확하게 명칭을 붙여줘야 된다는 거라.
만약에 쑤신다, '쑤심' '쑤심' 하고 명칭을 붙이면 이미 그런 상태에서 두세 번 정도 '쑤심' '쑤심' 할 거 같으면 이 쑤시는 게 굉장히 강해지는 걸 느낍니다.
그래도 다시 '쑤심' '쑤심'하고 관찰을 할 거 같으면 이 쑤시는 게 현격하게 감소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쑤시는 게 요놈의 살갗이나 요런데 쑤시다가 인제는 뼛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이동하는 것들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장소를 이동하는 것도 더 강해지니까 이거는 통증이구나 해서 '통증' '통증'하고 또 관찰하게 됩니다.
고통과 그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과 그 고통을 알아차리는 마음과 세 가지를 분리시킬 수가 있다는 겁니다.
분명하게 자기가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 이게 몸의 현상이고 이게 마음의 현상이구나 하는 걸 갖다가 이해를 하게 될 때 고통스런 느낌은 현저하지 않게 됩니다. 많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들 오래도록 앉아있으면 다리가 고통스럽죠.
왜? 몸과 마음 또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이 세 가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자꾸 일어나는데 그걸 구분할 수 있을려고 할 거 같으면 그 정도 고통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하고 관찰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것이 뼛속에서 일어나는지 살갗에서 일어나는지 요놈의 고통의 정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이해를 하고 나서 균형을 맞춰줘서, 노력과 집중이라는 것을 균형을 맞춰줘서 이걸 관찰하게 될 때 고통이 증가하고 감소하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도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미 그때는 내가 그런 고통스런 느낌이 많이 일어나지지 않습니다.
이미 몸과 마음의 관계를 이해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고통스런 느낌이 나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는 거라.
물론 그러다가 쭉 더 수행을 해나가서 지혜가 성숙해나가다가 삼법인이 드러날 때가 되면 또 고통이 굉장히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때는 막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진동이 일어난다든지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메스꺼워가지고 토해내려 하는 느낌들도 일어나고 그럽니다. 지금 뭐 '고통' '고통' 아니면 '즐거움' '즐거움' 이런 게 아니고, 그때는 아주 그런 느낌들이 강하게 일어나집니다. 그거는 또 그거대로 관찰대상입니다.
그렇게 현저하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몸과 마음의 관계를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날 거 같으면, 고통스런 느낌들은 여러분에게 크게 영향을 안 미칩니다. 적어도 그렇게 될 때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어야 됩니다.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고통스런 느낌에 대해서 하고, 그다음에 즐거운 느낌, 무덤덤한 느낌에 대한 것들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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